그날 이후 집에서 가까운 공원을 자주 찾았다. 가을 공기를 마시며 걷노라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유의 공간으로 이동하여 내면의 소리에 언어의 조각들이 모여드는 것 같았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아들과 남편 뒷바라지에 자신의 시간을 쏟아부었던 지난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화장실에서 시작한 하루는 집 안의 먼지들과 씨름한 후 저녁 무렵이 되면 눈을 감을 때까지 어떤 음식으로 두 남자의 건강을 챙길까,라는 의무감으로 보냈다. 그 대가를 받고 싶다는 기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외로움에 오십 대를 맞이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공원의 날씨는 선선했다. 걷는 사람은 몇 사람 없어 교교하면서도 고즈넉했다. 휴대폰은 주머니 속에 넣고 자연을 벗 삼아 걸었다. 비어있던 내면으로는 어느새 지난 세월들이 반추에 반추를 거듭하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후회도 기뻤던 일도 슬펐던 일도 운동화 밑창 틈 새로 들어와 그녀를 감쌌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잘 살겠지,라는 질문을 건네 보기도 했다. 오롯이 그 사람과 보냈던 삼 년의 시간이 바람을 타고 옷깃을 스쳤다. 필경 눈물을 흘릴 것을 알면서도 손을 잡고 절대 헤어지지 말자고 손깍지를 끼우며 걸었던 시간들이 짙은 음영으로 다가왔다. 비가 오는 날 주점에서 조용한 웃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소주잔을 마주하던 밤, 두 손을 꼭 잡고 영화관 한편에서 영화를 보던 날, 소나기 내리던 날 우산 밑에서 그의 가슴에 그녀를 묻고 걷던 날 등이 빗물이 쏟아져 내리듯 밀려왔다. 그렇게 잊고 지냈던 예쁜 기억들을 반추하며 어쩌면 새 남자 친구를 만날 수도 있겠다는 은밀한 기대를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