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는 사랑처럼

by 김곤

나는 결혼 전에 세 번 연애를 했다. 첫 번째 여자친구 이야기는 앞에서 소개했기 때문에 오늘은 다른 명의 여자친구에 대한 얘기를 간단하게 한다. 옛사랑을 기억에서 꺼내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주제가 글쓰기와의 사랑 이야기라서 그녀들과의 다른 추억은 절제했다. 그녀들의 이름은 다 가명으로 했다.



세 번째 여자친구는 3년 동안 만났는데 동생이 없었던 나는 그녀를 여동생처럼 아꼈고 그녀도 나를 친오빠 같이 좋아했다. 둘이 만난 지가 2년이 넘었을 때였다.

"오빠, 이번주에 우리 집에 올래?"

여자친구가 물었다.

"왜?"

내가 물었다.

"부모님이 오빠를 만나고 싶으시대"

그녀가 말했다.

"그래. 그럼 일정 잡아 얘기해 주라."

내가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녀 집을 방문했고 아파트 안에 들어서고 나를 위해 거실에 마련된 상차림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곳에 오기 전에는 없었던 부담감이 내 어깨를 누른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내가 말했다.

"어서 와요."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어서 오게"

그녀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며 악수를 청했다.

"감사합니다."

악수에 응하며 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언니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형부!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여동생이 방에서 나와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말했다.(동생의 형부라는 호칭에 낯설었다.)

"자, 앉아요."

그녀의 어머니가 말씀했다.

그녀의 부모님들은 맏딸의 남자친구 방문에 상차림을 거하게 준비하셨다. 20대 후반이었던 나는 그때만 해도 술을 잘했기에 그녀의 아버지께서 권하시는 술잔을 연거푸 비웠지만 긴장을 한 탓이었는지 술이 세서 그랬는지 나의 정신은 멀쩡했다.

"집에서 막내라고?"

그녀의 아버지가 말씀했다.

"네.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딸만 있어서 자네가 우리 식구가 되면 장남이나 마찬가지야"

그녀의 아버지가 말씀했다.

"..........."

나는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는데 가슴 한편으로는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 무게감은 그날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나는 장남 같은 사위가 될 자신이 없어 그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우리는 결국 3년간의 만남에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조건 없는 그녀의 사랑과는 반대로 나는 '장남 같은 사위'라는 말에 갇혀 헤어 나오질 못하면서 '만일 이 친구와 결혼을 면...'이라고 스스로 조건을 붙였고 막내아들로 자유로운 영혼처럼 살았던 나로서는 큰 사위에 대한 부담을 이겨내지 못했다.



1989년 일본행 비행기 안에서 나의 옆자리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성이 앉았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식사시간에(이때만 해도 스테이크에 빵류, 초밥이 나왔다) 그녀가 초밥을 한 줄 먹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학생이에요?"

"네. 그렇습니다."

그녀는 일본에서 사립 명문 대학원을 다닌다고 했다.

"그럼, 지금 일본어학교 다녀요?"

그녀가 물었다.

"네."


그녀는 일본의 명문 사립대 중 한 곳을 졸업한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외국인이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지금처럼 많지 않아서 박사과정에서 한국인이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금년에는 이곳저곳 시험을 봐야 하겠네요?"

그녀가 물었다.

"그렇죠. 3군데 정도 지원하려고 합니다."

내가 말했다.(나중에 나는 두 군데를 지원했고 그중 한 곳을 졸업했다.)

그녀는 나에게 대학 입시 정보에 대한 조언을 하며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하라고 하며 전화번호를 건넸고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에 아는 사람이 없었던 나는 오래전 친구라도 만난 듯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녀가 알려준 번호를 눌렀다.

"안녕하세요? 누나라고 불러도 될까요?"

한참 나보다 위인 그녀에게 내게 말 놓을 것을 제안하자 그녀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탔다.

"그래. 잘 지냈어?"

"그럼요. 잘 지내시죠?"


일본의 대학 진학 시험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있잖아. 혹시 여자친구 있어?"

"아니요. 지금은 없어요."

"그럼, 괜찮은 친구가 있는데 소개해줄까? 대학은 졸업하고 직장 다니고 있어."

"........"

나는 침묵했다. 쑥스럽기도 하고 번째 여자친구 수연이와 헤어진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중에 해주세요. 지금은 좀..."

내가 말했다.

"그래. 그럼 언제든지 말만 해. 소개해줄게."


대학 입시준비에 정신없이 보내고 몇 달이 지났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누나! 잘 지내셨어요? 저기, 누나 학교의 철학과는 어때요?"

내가 말했다.

"글쎄, 교수진이 좋은 것으로 아는데. 왜 지원하려고?"

그녀가 말했다.

"생각 중입니다."

내가 대답했더니 그녀가 물었다.

"아직 여자친구는 없지? 없으면 만나볼래? 그때 얘기했던 친구말이야."

나는 거절을 못하고 그녀의 연락처를 받았다.



얼마 후 셀레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저는 김곤이라고 합니다. 혹시 지수 씨 되시나요?"

"네. 그런데요."

나는 대학원생 누나의 이름을 얘기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번주 주말에 시간이 되시나요?"

"네. 괜찮아요."

우리는 그녀가 사는 지역인 동경 우에노에 있는 우에노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제가 치마와 바바리에 검정 백을 들고 공원 안내소 옆 벤치에 앉아 있을게요. 머리는 짧은 단발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네. 저는 키가 180 정도에 금테 안경 썼습니다."라고 나의 인상착의를 알려주며 말했다.


지금이야 핸드폰이 있어서 사진 전송 한 번으로 상대방을 알 수 있지만, 때는 만나기 전에 자신들의 인상착의를 상대에게 인물화 그리듯 알려야 했다. 약속장소에서는 남자가 다가가서 상대를 확인한 통성명을 하고 어디에 사는지, 취미기 무엇인지, 술은 좋아하는지 등 서로에 대한 기본 정보를 교환했다. 그녀와 나도 그랬다.


자신감 있는 태도나 목소리는 상대에게 신뢰감을 주듯 나는 여성과 첫 만남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과감하고 정중하게 대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글쓰기와 만날 때도 막힘이 없는데, 쓰기를 시작하면 끝까지 가려고 한다. 산책할 때는 떠오르는 문장과 허공에서 만나면서 글쓰기와 속삭이며 수정 과정을 거친다.'


여성의 반응이 별로면 깔끔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 성공을 못 하더라도 괜찮은 사람으로 남지만 그렇지 않으면 치근덕거리는 남성으로 기억된다.


'글쓰기와 만날 때도 그러한데 붙들고 있어 봐야 지루함에 사유와 기싸움만 하다가 말기 때문에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그녀와 금세 헤어진다.'


나는 그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때 나는 상대와 처음 만나서 서로의 호감도를 파악하는 데에 많은 시간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고 그 이유는 마음에서 울리는 진동으로 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글쓰기와 속삭일 때처럼.




"와, 과감한데요. 첫 만남부터 손을 잡으시고."

"남녀 간의 만남이 어디 시간에 비례한가요. 지금 좋으면 좋은 대로 감정에 솔직하면 되는 거죠."

"..........."


나의 말에 그녀는 침묵하며 걸었고, 그 후 감사하게도 그녀는 나의 두 번째 여자친구가 되었다. 감사하다는 표현. 그것은 3년 정도 조건 없는 그녀의 사랑에 대해 지금도 감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나의 여자친구들처럼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 주어서 감사한다. 누구를 조건 없이 응원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만남의 시간과 상관없이 결혼에 조건이 붙는 경우도 있다. 아래는 예전에 아는 지인과 나누었던 말이다.


"의사 사위를 맞이하려면 열쇠 몇 개는 있어야 하더라고요. 내 딸이 몇 년 사귀던 녀석 하고 헤어졌대요."

"세상모를 일이네요. 몇 년이나 사귀고도 그런 일이 있나니."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 무서워서 딸 키우겠어요? 그 녀석도 그래요. 부모가 그런다고 줏대 없이 사랑을 버리나요?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지요. 조건이 붙는 만남이었죠. 옛날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끼리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내가 글쓰기와 같이 있으면 행복한 이유가 언제 어디서는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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