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사랑 후처럼

사유의 붓을 덧칠한다

by 김곤

나는 1996년 결혼했다. 아내와는 친구처럼 지낸 지 오래다. 나보다 2살이 아래인 그녀는 요즘 들어 누나라고 우긴다. 우리는 1년을 만나고 결혼했다. 만난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때였는데 내가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아내마음도 어떤지 궁금했다.

내가 물었다.

"우리 결혼할까?"

아내가 말했다.

"생각해 볼게."


만난 지가 얼마 안 되었던 터라 아내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만났을 때 나는 다시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물었다.

"저번에 했던 질문 있잖아."

아내가 말했다.

"뭐?"

내가 다시 물었다.

"결혼 얘기..."

아내가 말했다.

"그럼, 우리 4계절은 만나보고 그때 가서도 하고 싶으면 할까?


그리고 그 후 우리는 봄여름가을겨울을 보내면서 각자의 몫을 해냈다.



아내와의 만남 과정을 얘기하자면 이렇다. 내가 31세였을 때였다. 회사 홍보팀에서 일했던 나는 업무적인 술자리를 자주 했는데 그날도 전날 기자들과 마신 술로 머리가 아팠다. "얘! 오늘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커피숍에 12시까지 나가라. 엄마가 아는 분이 소개했는데 괜찮은 아가씨라고 하더라"

어머니가 말했다.

"알았어요."

내가 대답했다.


세 번째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으신 어머니는 내 결혼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지만 정작 나는 결혼 생각이 없다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날도 어머니의 성화에 한 여성을 만나야 했었다. 그전에도 어머니 소개로 만났으나 실망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어차피 마음에도 안 들 텐데 대충 하고 나가자는 생각에 '뻔하지 뭐! 또 그럴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집을 나섰다. 전날 숙취는 온몸을 감싸고 있었고 약속 장소인 광화문에 있는 커피숍에 도착할 때까지 상태는 나아지질 않았다. 만사가 귀찮고 빨리 만나고 집에 가서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던 나는 약속 장소에 도착 후 카운터의 직원에게 "ㅇㅇㅇ씨요"라고 얘기하고(이때는 직원에게 이름을 얘기하면 이름이 적힌 안내판을 들고 돌면서 찾아주거나 안내 방송을 해 주었다.) 그녀의 이름이 적힌 안내판을 따라갔더니 한 여성이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마시는 커피는 해장술과 같은 역할을 했다.


"커피 하시겠습니까?"

"네"


커피숍 안에는 소개팅으로 온 남녀로 가득했다. 우리는 대학 전공은 뭐 했냐, 취미는 무엇이냐, 주말에는 주로 무엇을 하냐.... 등에 대해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소개팅에 나가면 형식적으로 하는 대화였다. (글쓰기와는 이런 절차가 전혀 없었다. 그냥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되었다. 그런 자유가 있어 좋았다.)



그녀와 헤어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을 때였다.


"도련님! 다음에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건 안 들건 전화번호는 꼭 물어보세요. 그게 예의예요"


형수님이 했던 충고가 귓가를 스쳤다. 한 번은 형수로부터 한 여성을 소개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녀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고 헤어지는 바람에 형수님을 곤란하게 한 적이 있었다. 미인에 엘리트였던 그녀는 자존심이 상해 그 후로 형수님을 멀리 했다고 했다. 나는 그날 이후 만날지는 상관없이 전화번호를 물었다.


"잠시만요! 전화번호 받을 수 있을까요?"

"잠깐만요, 여기요."


그녀는 테이블에 있던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이때는 각 테이블에 모나미 검정볼펜과 한 장씩 찢어서 사용할 수 있는 두꺼운 메모 책자가 놓여 있었다.)


일주일 후 주말이었다. 그때 받은 그녀의 집 전화번호가 내 양복 주머니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 그녀를 만날 생각이 없었고 술에 덜 깬 정신에 그녀의 얼굴을 기억도 못했다. 나중에 아내로부터 들었지만 아내도 나와 똑같은 생각이었다고 했다.) 주말이 되면 짝 없는 청춘들이 특별한 일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별게 있던가. 나는 '할 일도 없는데 그녀에게 전화나 해볼까?'라고 중얼거리며 다이얼을 돌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ㅇㅇ이라고 합니다. ㅇㅇㅇ씨 댁이죠?"

"네. 그런데요."

"죄송합니다만, 혹시 ㅇㅇㅇ씨와 통화할 수 있을까요?

"잠시만요."


잠시 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특별한 것 없으면 보실래요?"

"네. 그러죠."


우리는 그날 그녀의 집 근처에서 만나 소주잔을 부딪히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하는 시간이 흐르면서 내 마음에서 '이 사람인가?'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세 번의 연애를 했지만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결혼할 사람을 만났나?' 처음에 만날 때만 해도 예상을 하지 못했던 생각이 마음속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사람 마음은 모를 일이었다.



이때처럼 글쓰기와 만날 때도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가 났는데 지금까지 만났을 때와 결이 달랐다.


"시작해 봐. 기업 홍보팀에서도 많은 글쓰기를 해 봤잖아. 그리고 예전에 영화감독을 꿈꾸며 많은 음악을 들었잖아. 그 감성을 깨워봐!"


세 번의 사랑 후 아내와 만나고 사랑에 철도 들고 새로운 나를 만났던 것처럼 글쓰기와 만나고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을까? 지속가능한 사유의 힘이 내게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면서 숨어있던 나의 감성들과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온종일 글쓰기와 속삭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열정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주위에 펼쳐져 있는 끝없는 지평선에 나의 감정이 흠뻑 젖어 사유의 붓을 덧칠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세 번의 연애 후에 아내를 만나서 결혼을 고민했을 때 '아... 이 사람하고는 평생 같이 가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처럼 글쓰기와도 그렇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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