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더라도 약을 넉넉하게 받아 놓지 않는 버릇이 있다. 사실 충분히 약을 받아 놓고, 증상이 호전되면 약을 안 먹어도 된다. 하지만 약을 넉넉하게 받으면 금방 나을 병도 왠지 더 늦게 나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받은 약을 다 먹을 때까지 증상이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최근에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도 그랬다. 병원에 가면 일주일분의 약을 받아오곤 했다. 최대 한 달분까지 한꺼번에 약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약이 떨어져서 병원에 다시 가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일주일분의 약을 택했다.
내 회복력을 너무 맹신했던 걸까. 근거 없는 뇌피셜을 과신했던 걸까. 좀처럼 몸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일주일 안에 기필코 낫고야 말겠다는 오기를 부려봤지만, 계속되는 통증에 무너져 내렸다. 통증은 몇 달째 지속되었고, 약은 금방 떨어져서 매주 병원을 가야 했다.
이제는 쓸데없는 믿음을 폐기해야 할 때였다. 마음을 바꿔 최대한 많이 받을 수 있을 만큼 약을 받아서 통증과의 장기전을 선포했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면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번에는 통증과 맞서 절대 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우선 잔뜩 받은 약을 사무실 책상 한편에 쌓아두었다.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2회씩 복용하는 약이 한 달 치가 모이자 약봉투가 꽤나 두툼했다. 사무실에 놓아둔 약봉투를 문득 바라보았다. 별안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앞으로 한 달간은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감도 들었다.
그래서일까. 받아온 약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통증이 개선되는 느낌이었다. 말로만 듣던 플라시보 효과를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대량의 약을 한꺼번에 받아온 그날부터 갑자기 통증이 사라졌고, 결국 받아온 약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모든 일은 마음가짐에 달린 일일지도 모르겠다.
몸이 안 아프면 가장 좋겠지만, 혹시라도 아프게 되면 앞으로는 약부터 잔뜩 타놓으려고 한다. 그리고 낫자마자 쿨하게 남은 약을 폐기하며 약과의 이별을 선언할 것이다. 마치 오랜 수험생활을 끝낸 학생이 교과서를 정리하듯이. 그렇게 해서라도 빨리 나을 수만 있다면 남은 약이 전혀 아깝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