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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언 Aug 06. 2020

생존 아닌 놀이로 공부하는 엄마의 탄생

나를 가장 나이게 만들며 또한 나를 가장 아프게 하던 것

나는 원래 공부를 좋아했다. 스스로 한글을 떼고 책을 읽었다. 배우는 게 좋아서 어렸을 때부터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혼자 영어책을 사다 풀고 프로그래밍을 독학하던 나다. 나를 닮았는지 28개월 둘째는 책을 참 좋아한다. 책을 읽다가도 문자를 가리켜 이게 뭐냐 묻는다. 숫자는 이미 일부 인지하고 있다. 글씨만 보이면 고개를 돌리던 첫째와 참 다르다.


첫째는 우뇌형 아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만들기에 능하다. 소근육 발달이 월등히 빠르다. 얼마 전에는 유치원 담임선생님께 발표를 잘한다고 칭찬받았다. 말은 잘 하지만 한글이나 숫자는 통 관심이 없다. 책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좋아한다. 남편을 닮아 상징 학습에 느린 난독증 기질이다. 어릴 때부터 알고 청각 자극을 주었더니 불균형이던 발달을 따라잡았다. 하지만 그래도 글자는 조금 느릴 것 같다.


언젠가부터 자꾸 실망의 눈빛을 날리게 됐다. 정말 똑똑한데, 모르는 건 진짜 어떻게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다. 나도 이렇게 답답한데 너는 얼마나 답답하겠니. 알면서도 속상했다. 빛나는 아이를 온전히 보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런 나를 바꾸고 싶었다. 그러던 중 푸름아빠 거울육아의 한 파트를 읽게 되었다. 내 행동은 나의 상처받은 내면아이와 연관이 있었다. <대면> 항목에 있는 대화를 내게 하는 질문이라 생각하고 대답해보았다.


출처: 푸름아빠 거울육아 by 최희수


대면자: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엄지: 첫째한테 자꾸 실망의 눈빛을 하게 돼요.


어떤 경우에 첫째에게 실망의 눈빛을 하게 돼?

문자 학습을 싫어해요. 책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영어도 관심 없어요. 나는 정말 조심히 다가가는데 매번 대놓고 싫다고 표현할 때 억장이 무너져요.


그럴 때 어떤 말을 하고 싶어?

어서 배워야지! 그래야 따라갈 수 있어! 너한테 좋은 거야!


큰 소리로 말해봐. 배려 깊은 사랑을 하지 않고 마음 키는 대로 소리 지르면서 아이를 키우면 아이들이 잘 큰다고 할 때, 어떤 말을 하고 싶어?

야 정신 차려! 너 이거 안 배우고 어떻게 하려고 해. 이 험난한 세상 어찌 살아가려 그래! 정신 똑바로 차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똑똑하고 공부 잘해야 인정받는 세상이야! 딴 거 잘해도 공부 못하면 모든 게 어려워져! 배워. 노력해. 그래야 사는 거야.



분에 못 이겨 엉엉 울다가 이내 잦아든다. 그래야 사는 거라니... 나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걸까. 내 내면아이의 말에 내가 놀랐다. 조용해질 때 다시 질문에 대답한다.



거기 어디야?

내 방이에요


갇혀있어?

아니요. 하지만 내가 문을 닫았어요.


언제 거기에 들어갔어? 정확하지 않아도 돼.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해봐.

초등학교 4학년 때에요.


왜 그곳에 들어갔어? 그곳을 뭐라고 부르고 싶어?

외로운 곳이요. 사람들은 내가 공부를 잘하니까 좋아하는데, 사실 나는 원래 사랑받지 못하던 그저 그런 사람이에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내가 세상을 버틸 무기는 하나밖에 없어요. 나는 가끔 힘들어 숨고 싶어요.


지금 몇 살이야?

마흔 살이요.


29년 동안 외로운 곳에 있었네. 외로운 곳에서 애를 낳고 키웠어. 이제 외로운 거기서 나와.

나올 힘이 없어요.


외로운 곳에서 나오면 안 좋은 이유가 뭐야? 안 좋은 이유 딱 하나를 말해봐.

원래는 그렇지 않은데 내가 잘하는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달라져요. 모자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요.


엄마가 안 나오면 아이들이 들어가. 아이들은 엄마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가. 내적 불행은 5대까지 간다잖아. 어서 나와.

문고리 잡고 돌릴 힘이 없어요.


힘을 내봐. 벽을 지탱해 일어나 봐.

나왔어요. 아이들과 남편도 함께예요.


모자라다고 생각하고 달리 대하는 사람 있어?

아니요. 사람들은 멀리 있어요.


이제 거기 다시 들어갈래?

아니요. 그 방은 외로워요. 잠가 버렸어요.


지금 있는 곳은 어디야?

햇빛이 비치는 곳이에요. 풀도 있고 나무도 있어요. 꽃이 살랑살랑 흔들려요. 곤충들이 날아다녀요. 아이들이랑 남편이 매미를 잡고 있어요.


해님이 뭐라고 해? 방안에 계속 있으라 해?

아니요. 기다리고 있었대요.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하고 싶어? 표현하면 그 상황이 창조돼.

나는 천국에 있다.


몸으로 한번 표현해봐.

이효리의 해초댄스♡



나에게 공부는 놀이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의 공부 능력이 사회에서 무기가 되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평소의 나는 김 빠진 콜라 같았다. 특히 부모님의 부재로, 초등학교 때 어떤 선생님께 내가 타깃이 되었다. 학급 임원이었는데 나만 부모님이 오지 않은 것이다. 나는 작은 코투리로 불려 나가 반 아이들 앞에서 싸대기를 10분 동안 맞았다. 원래도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했던 나였다. 나의 불안 등에 불이 켜졌다.


살기 위해 공부했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공부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즐기고 좋아하던 공부가 내 생존 무기가 되었다. 선생님들은 나를 더욱 이뻐했고 아이들은 나를 우러러보았다. 아이를 낳고 나도 모르게 그런 나의 마음을 투여했다. 너 이래서 힘든 세상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그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런 나의 아픔이 세상에서 나를 가두었다. 나는 자주 동굴에 들어가서 혼자 쉬었다. 부족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왔다. 나는 여전히 공부를 좋아한다. 책 읽는 게 재밌다. 하지만 이제는 생존을 위해서가 아닌, 진짜 취미로 즐겁게 한다. 어린 시절 진정한 즐거움을 위해 공부하던 나로 다시 거듭났다. 그리고 더 이상 아이에게 그런 내 아픔을 투여하지 않는다. 나는 외로운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곳은 너무나 따뜻하고 편안하다. 이곳엔 비교가 없다. 즐거움과 보람이 가득하다. 아이의 속도에 맞춘다. 천국이다.




헬렌, 못해도 괜찮아. 서툴러도 괜찮아. 시간이 걸려도 괜찮아. 천천히 하면 돼. 포기하지 않으면 돼. 그저 도착하면 되는 거야. 네가 만든 걸 보여줄 때마다 엄마는 깜짝 놀라곤 해. 엄마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발상을 해낼 때는 정말 경이롭기까지 해. 엄마는 너를 통해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넓어졌단다. 그래서 오히려 네게 고마워. 얼마 전 네가 매미를 못 만지는 엄마에게 말했지? 엄마, 괜찮아. 노력하면 돼. 같이 해보자. 천천히 해봐. 네가 대견해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엄마에게 말하듯 네 스스로에게 그리 할 거라는 걸 알아. 엄마는 널 믿어. 네가 항상 자랑스러워. 존재만으로 사랑해. 네 앞날을 축복해.



무지개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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