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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블루밍 Oct 04. 2021

생각하는 사람

거대한 인텔리전스와 함께 사는 법


어렸을 때 나는 부끄러움이 많아 얼굴이 쉽게 빨개지는 편이었다. 손들고 질문은커녕 숨소리도 조용히 내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하루는 선생님이 앞의 화면에 보이는 시를 읽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선생님의 다그침에 울어버렸다. 호랑이처럼 무섭기로 유명한 선생님이긴 했지만 울 것까진 없었는데. 시력이 나빠져 화면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요,라고 그냥 이유를 말하면 됐는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당황해 말도 못 하고 울먹이기만 했던 아홉 살의 나를 떠올릴 때면, 아직도 볼이 화끈거리는 듯하.


정확히 그때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일들을 여러 번 겪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말을 잘하고 싶다. 내 의견을 조리 있게 이야기할 줄 알아야겠다. 얼굴이 빨개지는 바람에 내 감정을 투명하게 들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무의식 속에서도 작용한 걸까. 4학년 때부터 나는 반장, 회장을 줄곧 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방송부 활동을 하며 교무부장 선생님과 함께 운동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때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는 게 재미있다는 걸 느꼈던 것 같다. 이를 시작으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총 6년 동안 방송부 아나운서 활동을 했다. 교내 방송을 열심히 챙겨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저 마이크에 대고 조곤조곤 준비된 멘트를 날리는 게 재미있어서 계속했을 뿐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방송 대본을 쓰고 낭독하는 일. 지루한 일상 속 단비 같은 취미였다.


감투는 중학교 때 전교 부회장을 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반장을 했던 게 마지막이었다. 1학년 말 첫 연애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경험과 자극이 신경을 지배했고, 왜인지 조금은 의존적인 성향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칠판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게 다시 부끄러워졌다. 아홉 살 때로 회귀한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예정된 발표는 줄곧 잘했다. 철저한 준비성 덕분이었다. 다만, 별 거 아닌 내용이라도 임기응변이 필요한 화술은 부족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고, 나는 방송 관련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았다. 정작 진로를 생각할 때에는 말하는 것과 관련된 일을 배제했다. 스피치는 내 취미이자 특기인 행위 중 하나로 전락했다. 하지만 진로에서 멀어졌을 뿐 스피치를 잘한다는 점은 나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팀플에서 PPT 발표를 도맡아 하거나 대외활동에서 프레젠테이션 경쟁을 할 때, 반응이 꽤 좋았다. 평소 조용히 있던 나에 대한 시선이 발표 후 달라졌음을 느꼈다. 특히 취업을 할 때 면접전형은 내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단계였다. 어떤 금융공기업 PT면접 때였다. 면접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받은 카드에 적힌 주제를 30초 동안 정리해서 3분간 발표해야 했다. 회사의 발전 방안에 대한 내용이었고, 면접관들 옆에 번쩍이는 스톱워치에 0:00이 떴을 때 내 발표도 끝이 났다. 어쩜 이렇게 시간을 딱 맞췄냐며 여러모로 칭찬을 받았다. 또 다른 금융공기업의 PT면접은 당일 제시된 주제에 대해 간략하게 PPT를 만들어 발표하는 형태였다. PPT 발표는 대학생 때도 자주 했기에 유달리 자신 있었다. 발표가 대단히 논리적이라며 칭찬을 받아 으쓱했던 기억이 있다. (두 곳 다 1차 면접에서는 칭찬을 받았지만 최종에서는 떨어졌다. 필기점수가 낮거나 임원보다는 실무진들이 날 더 좋아하나 보다.) 


사람들 앞에서 말만 시켜도 얼굴이 시뻘게졌던 아홉 살짜리가 발표에 자신 있는 스물아홉 살로 성장했다. 부끄러웠던 일을 오기로 극복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뚜렷한 장점이 탄생했다. 오롯이 사람의 감정과 생각, 행동을 통한 성장기다. 


요즘은 로봇에 의해 사람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팽배하다. 먼 일 같지만 인공지능은 생각보다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내가 어제 주문한 옷은 사실 구매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습관처럼 사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간의 내 취향을 남자친구보다 더 잘 꿰뚫어 본 AI가 만든 광고에 홀려 구매 버튼을 누른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는 그동안 자신의 특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특화된 로봇에 의해 묻혀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두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 첫째, 사람으로서 가능한 것들을 구축해나가야만 한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아무리 똑똑한 인공지능이 등장해도 건드릴 수 없는 유니크한 정체성을 정립해야 한다. 둘째, 내 취향과 일상이 현실 속 내가 진짜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AI에 의해 취향이 고정되고, 어쩌면 그 틀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나의 취향은 과연 나의 취향인가? 나의 정치적 성향은 과연 나의 정치적 성향인가? 나의 라이프스타일은 과연 나의 라이프스타일인가? 혹은, 이 모든 것은 알고리즘이 우리 의식에 주입시키고 강화시킨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더욱 근본적으로, 우리는 과연 인간인가? 현대인은 알고리즘에 따라 작동하는 로봇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의식, 취향, 관점, 태도의 이미 많은 부분이 알고리즘에 의해 프로그래밍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이미 로봇-신체를 가진 것이라고 보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 주영민, <가상은 현실이다>, p.260


어린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로봇의 개입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력자이자 방해물이 될 수도 있는 거대한 인텔리전스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티가 나지 않게 조금씩 많이 바뀌어가는 환경 속에서 부디 나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 어른이 된 나는 오늘도 야간 자율학습 대신 야간 사유학습에 임해 본다. 


사유(思惟)하는 밤을 통해 누구의 것도 아닌 밤을 감히 사유(私有)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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