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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블루밍 Sep 17. 2021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부끄러운 대로 자랑스러운


거의 2년 만에 영화관을 갔다. 코로나 이전에 즐겨하는 데이트 코스 중 하나이기도 했고, 가족들이랑 볼 만한 영화가 나오면 우르르 달려가곤 했는데, 정말 오랜만이었다. 영화관에 들어서는데 남사스럽게 심장이 두근댔다. 영화관 특유의 조명과 어둠, 좌중을 압도하는 스크린과 볼륨. 추억 냄새가 났다. 문득 고등학교 때 봤던 영화 전우치와 소셜 네트워크가 떠올랐다. 왜 하필 두 작품이었을까. 전우치는 다소 유치했고, 소셜 네트워크는 난생처음 졸면서 본 영화였다. (소셜 네트워크는 나중에 다시 보니 재밌었다. 그날, 유난히 피곤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영화관을 너무 오랜만에 와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영화관의 초창기 억이 떠올랐나 보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캐러멜 팝콘을 못 먹는다는 것이었다. 건강을 치는 달콤한 유혹. 스크린 앞에서만큼은 죄책감 없이 취할 수 있었는데, 관내 취식이 불가한 현시국이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영화업계도 타격을 받아 한동안 보고 싶은 개봉작이 없을 정도였기에, 기대감을 안고 볼만한 영화가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영화 <싱크홀>로 2년 만에 스타트를 끊었다.


서울에서 내 집 마련에 성공한 김성균의 이야기로 영화는 시작한다. 아파트가 아닌 빌라였지만 요즘엔 서울 신축 빌라도 구하기 힘들다 보니 등기 친 것만으로도 손뼉 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신축이라던 빌라는 맨바닥에 구슬이 굴러갈 정도로 기울어진 부실한 건물이었다. 상상도 못 할 만큼 대형 싱크홀이 생기면서 그 빌라는 일부 주민들과 함께 빛의 속도로 땅에 꺼지고 만다. 그들이 생사를 함께 하며 구조되는 순간까지의 스토리를 담은 작품이었다.


재난상황 속에서 사랑을 싹 틔운 이광수와 극 중 인턴의 구조된 후의 삶은, 현재 젊은이들의 상황을 대변한다. 그들은 캠핑카를 사서 전국을 일주하며 산다. 결혼을 했고, 정착이 아닌 (사실상 반강제적) 자유를 택했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월급은 정해져 있는데 집값은 계속 널뛰기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집을 포기하고 차를 산다. 미래의 안정보다 현재의 즐거움을 위해 소비한다. 이 생활을 지속한다면 그들은 전월세를 전전하며 살 수밖에 없다. 지금의 추세라면 전세+월세 형태인 반전세가 지배적이며, 궁극적으로 월세의 가속화가 이루어질 테니 무주택자가 감당해야 할 주거비용은 계속 증가할 것이다.   


영화는 함께 구조되었던 주민들이 캠핑카에 모여 맛있는 요리를 먹고 저 멀리 불꽃을 보며 즐거워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영화 상영이 끝나면서 나의 현실은 다시 시작되었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었지만 내 인생의 엔딩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나의 20대는 아쉽게도 올해로 끝이다. 성인이 된 후 10년 간 나는 어떤 것들을 선택하였고, 이루었고, 놓쳤고, 실수하며 살았는가. 앞으로 10년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금의 선택들이 모여 다가올 미래를 채워갈 것은 자명하다. 이 인과관계가 분명하다는 걸 깨달을수록, 점점 더 선택에 대한 부담감이 커지는 것 같다. 목표를 향해 전진하다가도 멈칫하게 되는 순간들이 생긴다.     

    

한 사람의 생애는 기쁘고, 아프고, 행복하고, 슬프고, 당당하고, 부끄러운 삶이 강물처럼 뒤섞여 흐르며 만들어진다. 이 책에 실린 열 편의 소설은 그 삶을 직조해 만들어 낸 작품이기에 부끄러운 대로 자랑스럽다.

- 이금이, <허구의 삶>


전생을 기억하고 있지 않는 한, 현재의 삶은 우리 모두 처음 살아보는 이다. 10대도 처음이고, 20대도 처음이며, 30대, 40대, 50대, 60대,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매일 첫 경험을 한다. (시간여행이 가능해져도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인 것은 같다.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그날은 두 번째로 살아보는 날이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갖는 애틋함을 '오늘 이 순간'에 담는다면, 좀 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네 삶은 부끄러운 대로 자랑스럽기에, 행복만이 아닌 슬픔과 부끄러움과 후회가 모두 조화롭게 섞여야 참다운 인생의 맛을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 인생이 영화라면. 나는 엔딩롤이 끝난 후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화이고 싶다. 그리고 작고 밋밋한 영화일지라도 그 영화에서 위안과 격려를 받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 가와무라 겐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내 인생도 막을 내린 후 누군가에게 따뜻한 힘을 주는 그런 영화로 남기를 바라며, 오늘을 살아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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