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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롱 Sep 15. 2021

나는 오늘부터 완벽함을 버리기로 했다

나의 요가 에세이 <생각은 멈추고 숨은 내쉬세요> 

전 직장 동료인 B언니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언니는 내가 요가에 빠져있고 최근에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듣고선 "참 대단해, 나도 몸만 유연하면 요가를 해볼 텐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알기로 언니보다 내가 더 유연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몸을 숙이는 전굴 동작이 안된다. 앞으로 숙이면 숙일수록 늘어난다기보다 어느 순간 툭 하고 허리가 끊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 내게 유연해야 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다니. 그래서 나는 "언니, 유연함과는 아무 상관없을걸요. 저도 여전히 뻣뻣해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언니는 "나는 요가 못해. 예전에 해보긴 했는데 동작할 때마다 두 다리가 덜덜 떨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다리를 떨게 되는 동작들이 몇 가지 있다. 밸런스를 맞추는 동작들인데 보통 한 다리를 들어 올리며 시작하는 것들이다. 예전에 밸런스 동작을 시범 보이는 선생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아무리 오래 수련한 선생님도 가까이에서 보면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다리를 떨고 있다. 선생님들도 시범을 보이고 지시를 하다가 집중을 놓치게 되면 여지없이 자세가 무너진다. 유연함을 떠나서 요가는 집중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 "우리 선생님도 시범 보일 때, 언니처럼 다리를 떨어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언니가 'ㅎ' 세 개만을 붙여 답장을 보내왔다.

 

요가는 떨리는(!) 운동


요가를 하면서 나는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왔다. 또 완벽한 요가에 대해 생각한 적이 많다. '다리가 떨리면 완벽하지 않은 것일까? 다리를 안 떨고 1분 이상 지속해야 완벽한 건가? ' 완벽한 동작, 완벽한 호흡, 완벽한 자세... 그렇지만 하면 할수록 그 기준이 무엇인지, 또 정말 완벽하게 요가를 할 수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선생님마다 지시하는 것이 다 다르고 시범 포즈도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나는 그것들을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없는 몸 상태다. 그럼에도 나에겐 완벽함과 가까운 어떤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떠올렸을 때, 아직 나는 한참에도 모자라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시범을 보이던 선생님이 "작년에 가르쳤던 것과 지금 가르치는 것이 또 달라요. 작년엔 이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라는 말을 했다. 배우는 입장에서 사뭇 당황스러운 말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어 "요가를 몇십 년 하는 스승들도 완벽한 티칭이 무엇인지 확신이 없다고 해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동작이 편하고 그걸 통해 몸에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다면 그게 완벽한 것이에요."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난 뒤, 완벽한 요가란 어떤 조건이 아님을 알았다. 보통 우리가 완벽함에 대해 말할 때 '~한다면'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예를 들어, '내가 얼굴이 예쁘다면', '내가 날씬하다면', '내 연봉이 지금보다 높다면'이라는 단서가 있어야 우리는 완벽에 가까운 상태라고 본다. 나의 경우를 예시로 들자면' 만약 내가 물구나무서기 동작을 할 수 있다면' 완벽한 요가인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인도에서 수행을 한 경험이 있어야' 요가에 대한 에세이를 쓸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만약 -를 한다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이 전제조건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보다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구나무서기 정도는 해줘야 다른 사람이 나를 요가 잘하는 사람으로 볼 텐데, 인도는 가줘야 요가에 대한 에세이를 쓸 자격이 있다고 볼 텐데 등의 생각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둘 때 생긴다. 더 놀라운 건, 실제로 저런 식의 핀잔을 줬던 사람이 없었단 것이며 저런 전제조건도 모두 내 상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를 한다면'을 만들어 나 스스로를 완벽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늘 인정받고 싶어 하는 내 마음에서 비롯된다.


진짜 완벽하게 어떤 것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더 이상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완벽함보다는 그저 충분하게 나를 다독이며 행하는 것이 더 낫다. 요가 선생님의 말처럼, 어떤 동작을 할 때마다 그것이 내 몸에 좋은 자극이 되면 충분하다. 상체 숙여 코가 무릎에 닿지 않는다 해도  숙였을 때 허리가 시원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한 발로 1분 넘게 서 있지 못하고 오르골 인형이 돌 듯 뱅그르르 구르다 들어 올린 다리를 내려놓는다 해도 노력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물구나무서는 동작을 하게 될 것이고 또 인도행 비행기를 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쯤에 나는 스스로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을 또 다른 방식으로 생겨나서 나를 괴롭힐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완벽하기보다는 충분함에 집중하기로 했다. '잘하고 있어, 지금도 충분해.'는 '만약 -를 하게 된다면 완벽할 거야.' 보다 훨씬 좋은 트리거다. 게다가 완벽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방해가 될 뿐이다. 완벽하게 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시작하고 또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게 최선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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