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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Apr 08. 2022

새로 살게 될 누군가에게

이사


며칠 후면 이사를 갑니다.

새로운 세입자 부부를 만난 적 있지만, 이 편지는 그분들뿐만 아니라 1501호를 거쳐갈 누구나에게 쓰는 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나가며 편지를 쓸 정도로 오래된 아파트 꼭대기층에서 먹고 자고 뒹굴었던 4년이 애틋한 별스런 세입자, 저에게 쓰는 편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혹시 인생의 소풍 같은 시간을 느껴보신 적 있나요?

길 위의 여행은 즐거움과 고생이 함께 따르지만 소풍은 나들이 간 날 집에서 편하게 잘 수 있습니다. 저에겐 지난 4년이 그랬습니다.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이 더 많았지요. 외부 환경이 만족스럽게 주어졌던 건 아닙니다. 그저 마음이 그랬다는 겁니다. 불안정했으나 25년이나 뿌리박고 살았던 곳을 떠나 여기로 이사 오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고, 눈 질끈 감고 낸 용기는 삶의 모퉁이를 돌아버린 결과가 되었습니다. 모퉁이는 결코 위로 올라가는 길은 아니나 같은 길 위에서 다른 방향으로 접어들게 합니다. 접어들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돌기 전에는 불안감이 극에 달합니다.


이 집에서의 4년은 모퉁이 돈, 돌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세상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 나아진 건 없어도 예전에 가져보지 못한 자유 그 자체였습니다. 원하지도 않은 음식이나 물건을 들고 불쑥 찾아오는 이도, 돈 벌러 나가야 되는 일도, 시간에 쫓기는 일도, 아는 이가 없기에 이웃에 신경 쓸 일도 없었습니다. 오롯이 저의 시간으로 움직였습니다. 방치했던 그라인더를 꺼내 직접 고른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보았고, 밤에는 잠을 푹 자고 낮에는 하릴없이 강변과 산길을 걸었습니다. 산책 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본래 집 냄새와 커피 향이 살짝 블렌딩 된 독특한 냄새가 풍겼습니다. 언제나 바깥에서 돌아오면 그 냄새가 나더군요. 그러면 저는 안도합니다. 처음 가져본 집의 냄새입니다. 냄새를 가지고 지금을 확인하고 붙들고 있었으며, 살고 있는 집을 벌써 아련한 추억처럼 간직하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집이 아니라 이 집에서의 시간이겠지만요. 너무 벅차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떠나온 곳에서 얼마나 힘겨웠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꼭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던 그곳이 이곳 생활이 익을수록 저를 향해 표정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을 칭송하는 누군가의 글을 읽었을 때 왜 그렇게 공감이 안되던지요. 나름 열심히 살았고 성장이라는 자부심 있었던 곳인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요. 지금 단맛에 빠져 제가 변한 것일까요, 그때가 살아내기 위한 가면이었던 걸까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성장은 ~인척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요. 어른아이였던 제가 진정한 어른이 된 듯 가장 괴로웠던 상황과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공감한다는 포용의 말들과 행동을 자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스스로 기특해하면서 말이죠.


허세였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이곳에서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 이어지니 자동 타이머처럼 째깍거리며 원래 모습 0으로 돌아오더군요.  불편했던 상황과 사람들을 포용하지 않으니 오히려 그 모습 그대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행복이 있다면 아마 이런 마음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고요. 새로운 곳에서 4년은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이젠 되찾은 저의 모습을, 생활을 불안해하지 않으렵니다. 길들여진 새처럼 괴로워도 안주했지만 이 집에 살며 저 멀리 돌아갈 숲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소풍이 아닌 여행 준비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저의 넋두리는 그만하고 들어오실 집의 숨겨진 사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래된 아파트 슬기로운 사용안내서라고나 할까요.


안방 화장실, 여기 좀 문제 있습니다. 혹시 묵은 큰일을 보실 때는 되도록 사용하지 말아 주세요. 십중팔구 막히니 일 보기 전 예민하게 고민해 주시고요, 혹 실수로 막히면 방법은 있습니다. 세탁소 옷걸이를 풀어 코 막고 눈을 가늘게 뜨고 몇 번 쑤시면 대부분 뚫립니다만, 되도록 이 상황 안 만드는 게 낫겠죠.

세탁기, 겨울에 조심해야 합니다. 꼭대기층 맨 가생이라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엔 얼기 쉬우니 세탁 후 꼭 수도를 잠그고 연결 호스를 뽑아 물을 털어놓아야 해요. 수도꼭지엔 열선을 반드시 감아 두시고요. 얼면 생활도 얼어 버린답니다.

온수, 이것도 겨울이 문제여요. 보일러가 고장 난 건 아닌데 온수가 느리게 나오거든요. 서비스센터에 도움을 요청해도 교체하지 않는 이상 별 방법이 없더라고요. 처음에 아주 물을 약하게 틀어야 최소한의 물과 최단 시간으로 온수를 뽑을 수 있는데, 그러고 나서 탭을 잘 조절하면 온수를 마음껏 쓸 수 있답니다. 약간의 감이 필요한 과정이고 몇 번 경험해 보면 누구나 터득할 수 있지만 성질 급하거나 섬세함이 편향적인 사람은 겨울 온수 생활이 괴로울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이 옆에 한 사람 있거든요.


이 집이 불편함만 있는 건 아니랍니다. 이젠 누릴 수 있는 걸 알려 드릴게요.


혹시 달빛, 햇살, 푸른 하늘, 아이들 노는 모습 좋아하시나요? 그러시다면 이 집은 최고입니다. 물론 계절과 시간을 잘 맞추셔야 합니다만 하늘만은 늘 열려 있습니다. 가을날 깊게 들어오는 마루 햇살에 온 몸을 맡기고 누워  창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세요. 짙푸른 가을 하늘이 창가득 펼쳐진답니다.

달빛은… 조금 만나기 까다로워요.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중간에 볼일 보러 일어난 깊은 (초가을) 밤, 안방이 환해 놀라울 정도라면 분명 창밖에 보름달이 걸려있을 거예요. 저도 몇 번 보지 못했습니다. 달빛보다 숙면이 소중하니까요. 그래도 이왕 잠 안 오는 날 달빛이라도 비쳐주면 푸근해진 마음은 잠을 부르겠지요.

아이들 노는 모습은 부엌 베란다 바깥으로 보입니다. 오래된 초등학교 넓은 운동장이 내려다봐지거든요. 한동안 코로나로 잠잠했지만 다시 조잘조잘 아이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운동회 때 줄다리기 경기를 마음 졸이며 베란다 관중석에서 관람한 적 있어요.


마지막으로 여기 함 봐주실래요!


화분을 주로 두었던 앞 베란다 배수통 옆에 저렇게 천손초 아기(클론)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발견하고 놀랐어요. 처음 천손초를 분양받아 키우며 여러 번 후회를 했었는데, 클수록 모습이 어떤 매력도 주지 못해서 말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이렇게 곱고 우아한 꽃을 피우는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아기의 고조할머니가 피운 꽃


잎가에 무수히 많은 클론들이 다닥다닥 붙어 어디든 떨어져 뿌리를 내리는 천손초 , 과한 번식력에 징그러우면서도 고개가 숙여지네요.

화분들은 모두 정리해 가져 가지만 저것만은 그대로 둡니다. 꽃을 보며 희망을 피우시길...


여기까지 입니다. 넋두리와 몰라도 될 정보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되었지만 깨끗하고 따뜻한 집에서 매일 밤 숙면 취하는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


2022년 4월 8일 금요일

 세입자 .












*덕소에서 마지막 글입니다.

이 매거진도 끝이 나네요.

아쉽지만 또 새로운 곳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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