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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Dec 18. 2021

바라보는 마음 3

우리 백조 보러 갈까요?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내릴 것 같은 회색빛 푸한 날씨다. 12월이 오기 전 가지치기며 낙엽까지 쓸어낸 카페 뜰은 오직 하얀 눈만이 어울릴 듯 정갈하다. 거기다 왁자지껄했던 손님들 소리마저 사라져 버린 낮의 여운은 한산함을 더한다.


이맘때쯤 일이 줄어든 인숙 씨는 늦도록 물러나지 않는 어둠 끝자락을 동무삼아 뜨겁고 연한 커피 한잔을 들고 어스름한 아침뜰에 혼자 앉아보곤 한다. 추위가 더 몰려오기 전 한해의 마지막 뜰을 즐기는 나름의 여유다.


머그잔 커피가 반쯤 내려가고 몸에 따뜻한 기운이 어린싹만큼 올라올 쯤 아들의 다급한 발걸음이 바깥 계단을 울렸다. 알바 젊은이 한 명이 미열과 두통, 메스끄움으로 연락이 왔는데 급체 같지만 미열도 안심할 수 없어 하루 쉬게 했다고. 자기는 오늘 외부 일이 있어 매장 일을 도울 수 없고 엄마가 오전 시간을 좀 메웠으면 좋겠다고 한다. 머리가 하얀 인숙 씨는, 그래? 할 수 없지 뭐.., 못 이기는 척했지만 마음은 이미 음악을 고르고 있었다.


나이 든 인숙 씨가 계속 서 있어야 되는 카페 주방일이 내심 반가운 이유는 음악을 고를 수 있는 특권? 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알바비는 안 받겠으니 음악을 맘대로 틀 수 있게 해 달라고. 은근 자기 주도, 중심적인 인숙 씨! 별다방을 흉내 낸 재즈 분위기 음악이 트렌드라지만 이제는 그 음악들이 좀 식상하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음악들이 많은데 왜 꼭 그것만 들어야 하나. 물론 카페가 음악 감상실은 아니지만  간혹 선택하지 않은 남이 골라준 음악으로 신세계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단 카페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사실은, 어쩌면, 아무도 귀에 거슬리지만 않는다면 무슨 음악이 나와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연인의 눈빛이, 이웃 아줌마의 학원 정보가, 부동산 계약 조건이, 훠얼씬 더 중요할지도. 거기다 진정 몰입이 필요한 사람은 귀를 틀어막고 있지 않나.


지난여름, 더위를 피해 카페로 들어온 이들에게 들려준 황병기 명인의 가야금 연주는 에어컨 바람 못지않은 시원함을 주었으리라 인숙 씨는 믿고 있다. 침향무, 숲, 춘설, 제목만큼 서늘하고 청명한 가야금 연주곡들은 강물을 곁에 둔 카페와 은근 잘 어울려 옛사람들 풍류를 재현했을 수도.  그럼 오늘처럼 착 가라앉은 날씨엔 어떤 곡이 어울리려나. 잠시 고민을 하던 인숙 씨는 서양 바로크 음악, 살짝 퐁짝풍으로 가기로 했다. 누군가는 회색빛 날씨에 더 젖어들 수 있고 누군가에겐 기분 전환이 될 수 있는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집 <조화에의 영감>, 12곡 전 악장이 끝나면 아마 오전 시간이 거의 마무리될 것이다.


 은빛 숏커트가 단정한 인숙 씨는 가느다란 바이올린 소리가 울리자 주방으로 들어서 올리브색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도 하고 젊은이가 뽑아준 커피를 손님에게 내어주기도 표정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주문을 받기도 한다. 이어지는 음악처럼 카페의 시간도 흘러흘러 협주곡 10번, 4대의 바이올린이 요란하게 서로 주고받는 1악장에 이르자 모임인지 한껏 꾸민 중년 여성 서너 명이 몰려와 잠시 소란스럽더니 이어진 고즈넉한 2악장과 함께 비슷한 또래의 순영이 혼자 들어섰다.


월문천을 걷던 순영이 은행나무 밑동 찔레가 갑자기 궁금해져 강변 쪽으로 돌아 언덕 카페로 올라온 것이다. 추위에 시들해졌지만 거뜬히 살아있는 모습에 안심할 때쯤 귓바퀴를 뱅뱅 돌아 들어온 바이올린 소리는 순영을 단박에 카페 안으로 불러들였다. 오래도록 강나룻 길을 걸을 때 늘 듣던 비발디 곡이 여기서 울리다니 의외였다. 음악 소리에 끌려 카페로 들어선 순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주문대로 갔다가 또 한 번 놀랐다. 머리가 하앟고 눈이 잠잠한 어르신이 꼿꼿하게 서 생긋 웃으며 주문을 기다리고 있다니. 자주 안으로 들어와 커피를 마신 건 아니지만  달라진 카페 분위기에 순영은 사뭇 놀라면 따뜻한 라떼를 한잔 시키고 뜰이 보이는 작은 창가로 앉았다. 그리고 언제나 들어도 전율이 살짝 이는 3악장에 이내 젖어들었다.


월문천 끝자락 팔당쪽과 미음나루로 갈라지는 삼거리 작은 공원은 걷는 이들에게 쉼터다. 순영이 벤치에 혼자 가만히 앉아있는 인숙씨를 발견한 건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이었다. 며칠전 카페에서 본 인숙씨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분명 그날 음악도 이 노인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라는 촉이 간질거렸다. 그러면 순영은 용감해진다.

저…, 안녕하세요... 카페에서 뵌 적 있어요.

그래요? 안녕하세요… 우리 카페 자주 오시는 분?

아, 네, 뜰에는 산책길에 자주 들려요. 은행나무가 멋져서, 하!

그렇죠, 나이는 모르겠는데 저도 그 모습에 반해 여기 살고 있네요.

카페에서 뵌 날 음악이 좋았어요. 평소와 다른… 혹시 직접 고르셨나요?

하하! 그랬나요. 반가운 소리네요. 이렇게 알아봐 주는 손님이 계셔서. 매니아까진 아니지만 우리 음악이나 서양 음악이나 오래된 걸 좋아해서 가끔 제 맘대로 골라 본답니다. 그 음악들도 당시엔 대중음악이었죠. 실례가 안된다면 이름이..?

네, 순영이요.!

순영씨도 음악 좋아하나 봐요?

저도 이것저것, 바로크 음악 좋아하거든요. 계속 반복되면서 변주가 되는 게 신기해요. 비슷비슷한데 또 다른, 지루할 틈이 없잖아요. 비발디, 바흐 그분들 세계관이 궁금해요.

그렇죠, 골드베르크 변주곡 들으며 비슷한 생각 했어요. 우리 인생살이 같기도 하고, 매일 똑같은 시간 비슷한 나날이지만 하루도 똑같은 날은 없고. 오늘은 순영씨 만나 일상이 또 변주가 되었네요.


혹시.,. 백조 보러 갈래요?

오늘 그것들 보려 단단히 벼르고 나왔거든요.

산책 나온 거 맞죠?


뜻밖의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오랜 이웃인 듯 정답게 걸으며 이런저런 사람 사이에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라고 언제나 이야기가 술술 풀리지 않는 것처럼 첫 만남 일지라도 이야기가 술술 풀리는 경우도 있지않나. 어쩌면 세월은 필요한 경우만 적용되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무색하게 잘 걷는 인숙 씨와 달리 순영은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백조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부지런히 발을 맞추려 애썼다. 팔당대교에 가까워지자 정말 멀리 하얀 무리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들이 내는 소리인지 꿔억거리는 요란함이 전해졌다.


와~~~ 저것이 백조?

맞아요, 우리말로 큰고니라 하죠. 저기 건너편 작은 섬이 당정섬이라는 곳인데 한때 무분별한 개발로 사라졌다가 퇴적작용으로 서서히 자연 복원된 곳이에요. 지금은 겨울 철새들의 안식처로 생태계 보전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지요. 특히 천연기념물인 큰고니 도래지로 11월에서 2월까지 장관을 이룬답니다.

순영씨! 가까이서 보려면 저기 팔당대교를 건너야 하는데 갈 수 있겠어요?

넵! 백조를 위해서라면.


자전거 길 따라 두 사람은 다시 타박타박 걷기 시작했다. 다리로 올라서자 대낮임에도 안개에 휩싸인 한강 줄기가 웅장하게 펼쳐졌다. 큰 도시를 끼고 있는 강이 어쩌면 이렇게 크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아직 이곳이 낯선 순영은 감탄하며 계속 걸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뱅 두르는 길을 통과하니 바로 당정뜰이 나왔다. 고니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스스로 그러한 모습 앞에서 두 사람은 말을 잊었다. 말하지 않아도 큰고니, 인숙씨, 순영 그리고 강물은 다 알고 있으니.


나이가 들어 좋은 건 이렇게 바라볼 수 있고 때론 멈출 수 있는 게 좋아요.

자연도 사람도 그렇게 해야 될 때가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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