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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Dec 06. 2021

바라보는 마음 2

어느 카페 주인 이야기



- 여보, 일어나셔요! 오늘은 은행잎을 좀 치웁시다. 적당히 치워야지, 가을 분위기 낸다고 마냥 두면 너무 지저분해. 손님 오기 전에 일 끝내야지요.

- 어, 좀 피곤하네, 어제 가지치기한다고 무리했나 봐….

- 그러게요, 이젠 조금만 무리해도 몸이 딱 표시를 내. 그래도 우리 손으로 마당을 가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성진이가 여기 카페 낸다고 했을 때 처음엔 참 난감했는데, 이렇게 우리 소일거리도 생기고… 결과적으로 잘 한일 같아. 사람들이 카페를 찾아다니는 시절이 올 줄 누가 알았겠누, 있잖아 여보, 옆 건물 말이야, 어제부터…

- 그만! 아침부터 또 얘기가 늘어지네, 밥을 먹어야 일을 하지…



옛날엔 아름다운 모래 벌판이었다는 ‘미美사沙리’와 을축년 대홍수가 있기 전까지 인근에서 가장 크고 깊은 소沼가 있었다는 덕소리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동네들이다. 나는 은퇴 후 모래밭 쪽이 아니라 깊은 웅덩이 쪽에서 강물을 훤히 내려다보며 어쩌다 살고 있다. 강변에 듬성듬성 생겨난 카페들 중 담쟁이 덩굴로 적당히 둘러싸인 살구빛 벽돌 건물이 내가 사는 곳이다. 베이스가 퉁퉁거리는 음악이 들리는 카페는 1층이고 그 카페를 하는 나이 든 아들, 이 우리를 데리고 사는 건지 우리가 그 녀석을 데리고 사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2층에 셋이서 살고 있다. 지금은 건물 바로 앞에 2차선 도로도 있고 안쪽으로 들어서면 아파트도 서울 가는 전철역도 있지만 30여 년 전 '원덕마을'로 불린 이곳은 여기저기 어지럽게 일구어진 경계가 모호한 밭들과 사이사이 루핑 지붕을 얹은 허름한 주택들이 대부분이었다.


젊었을 때 나와 남편은 아뜨리에 규모의 작은 건축 사무소를 드물게도 함께 운영했다. 여자가 공부하고 대학 가는 게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림에 대한 갈망을 포기할 수 없어 어렵게 미대 진학을 했고 비슷한 처지의 건축 설계를 하는 남편을 만난 건 운명이었다. 서로 가지지 못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작업들은 우리들만의 아뜰리에를 키워가는데 큰 원동력이 되어 현장과 사무실을 늘 함께 누볐다. 한창 일에 물이 올랐던 80년대 중반, 의뢰인의 전원주택을 위해 미음나루 근처 석실마을을 가게 된 건 허공을 향해 던지는 플라잉 낚시처럼 미래를 향해 던져버린 단단하고도 가냘픈 낚싯줄이 되었다.


마이카 시대가 열리던 그때 첫차 하얀색 스텔라를 도로가에 세워놓고 좁은 길 따라 들어가 본 강가 풍경은 같은 한강일지라도 서울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겸재 정선의 산수화 '미호', 아름다운 호수같은 강이 바로 이곳이란 걸 후에 알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숲에 온 듯 오래된 수양버들이 축 늘어진 가지 사이로 살짝 비치는 은빛 물결은 반짝이는 고요가 무엇인지 보여 주는 듯했다. 그 모습에 반해 강 따라 자꾸 내려갔다가 깊은 소沼가 있었다는 동네까지 오게 되었고 둔치 언덕에 외롭게 서있던 우람한 은행나무에 마음을 뺏겨 쓸모 있기 매우 힘들어 보이는 땅을 그만 사고 말았다. 더운 날 강바람 쐬러 왔다가 운치 있는 나무 그늘이라도 편하게 누려보자는 심정으로.


뒤늦게 프랑스로 건축 공부하러 갔던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그 땅에 카페를 짓고 싶다 했을 때 어이가 없었다. 건너편 미사리에 노래 듣는 라이브 카페는 유명했지만 아들이 구상한 것은 유럽에는 아주 흔하다는 원두커피를 내려 파는 동네 카페라는데, 도대체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 누가 와서 그 쓴 커피를 돈 주고 마신단 말인가.


불과 10년 전 생각이 무색하게 믹스커피도 쓴 커피도 공존하는 시대는 금방 왔다. 한 사람이 1년 동안 카페에 쓰는 돈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다니 참 격세지감이다. 동네 사람들 뿐 아니라 서울 젊은이들도 여기까지 와 커피를 마시고 강변을 산책하는 걸 보니 카페는 커피를 빌미로 휴식의 의미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카페가 앉은자리는 조경을 따로 하지 않아도 이미 갖추어진 자리, 옛사람들이 말한 차경을 누릴 수 있는 자리다. 동네 끝자락 무용해 보이던 땅, 사람도 땅도 다 빛나는 때가 있나 보다.


카페의 자랑거리는 한강을 향해 나있는 전면 통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주인의 개인적 취향으로는 이제는 보호수로 대접받아야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월을 먹은 은행나무다. 입구 주변에 울타리 격으로 심은 엄나무, 사철나무도 제법 자태를 자랑하지만 은행나무의 위용에 비할 바는 아니다. 노란 은행잎을 달고 떨구는 요즘 같은 가을날을 그래서 카페의 계절이라 말하고 싶다. 거기다 이 늙은 은행나무를 더 근사하게 만드는 귀여운 친구들까지 생겨나기 시작했으니.


4월 어느 봄날, 밑동에 제비꽃 한송이가 피었고 해마다 무리가 늘어나더니 올해는 거의 동그란 띠처럼 밑동을 둘러 버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햇볕도 쐴 겸 주변 벤치에 오전 내내 앉아 바라보게 되는데, 11시 무렵이 되면 몰려드는 손님들은 어인 일인지 아무도 눈길은 주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은 손님마저도 앞사람과의 이야기나 서류 도장 찍는데 정신이 팔려 작은 제비꽃 같은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에게만 보이는 꽃인가 싶을 정도로 함께 나눌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어쩌겠나, 아무리 지천에 있어도 마음이 없으면 안 보이는 게 세상 이치인 걸.


그날은 마침 갓 온 쑥떡과 한라봉이 있어 알바생들한테 나눠주고 홀을 나오는데 은행나무 밑동을 뱅 두런 나무 벤치에 앉아 땅 쪽으로 고개를 박고 있는 조그만 여자의 등을 보았다. 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는 걸 보니 틀림없이 제비꽃을 발견한 모양이다. 마침내 고이 간직한 소장품을 알아봐 주는 이가 나타난것 같아 괜히 쑥스럽고 마음이 부풀어 올랐지만… 뭐, 그랬다는 거다. 그 뒤에 두어 번 더 제비꽃에 마음을 뺏긴 그 여자를 본 것 같은데, 쓰고 있는 보닛을 닮은 청회색 모자를 직접 만들었는지 멀리서 봐도 독특해 알아볼 수 있었다. 늘 그 모자에 마스크, 카키와 밤색 중간쯤인 야상점퍼를 입고 있었으니까. 한 번은 오후쯤 창으로 강 쪽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그 모자를 발견했다. 아, 강변 산책을 하다가 이쪽으로 올라오는구나.




오늘 아침은 더 이상 빛바래고 지저분해진 은행잎을 그냥 둘 수 없어 작정하고 남편과 치우기 시작했다.


- 여기 좀 보셔요. 제비꽃 옆에 다른 씨들이 싹을 틔웠어. 이건 찔레 같고, 이건 맥문동, 이건 비비추인가? 세상에나!

- 다른 건 모르겠고 나도 찔레 잎은 알겠어. 어릴 때 봄이면 어린 순을 많이도 꺾어 먹었거든. 꼭 풋내 나며 달큰하고 아삭한 게 오이맛이랑 비슷해. 어머니가 찔레꽃을 참 좋아하셨는데.. 저기 아파트 울타리 장미 옆에 찔레꽃이 있더니 이쪽으로 까치밥이 날아왔나 보군….

- 일단 겨울나야 하니까 그냥 여기 둘까?

- 그렇지, 옮겨 심더라도 내년 봄에 해야지.

- 난 그냥 은행나무에 기대어 키웠으면 좋겠어. 상상해봐, 하얀 찔레꽃이 은행나무 둥치를 두른 모습…. 한 번도 못 봤지만 낭만적이지않아?

- 이 사람 또 시작이네, 빨리 일이나 하자고, 손님들 몰려오겠어. 우린 우렁 부부가 되어야 해!







* <어느 브런치작가 이야기>와 짝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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