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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저녁노을과 불꽃놀이

by F와 T 공생하기
호주에서의 나의 일상은 대단히 단조롭다.


약간의 빵, 요거트와 시리얼을 먹고, oat milk, 요거트, 바나나, 복숭아, 딸기, 오이, 토마토 등을 섞아 갈아 마시면서 여러 알의 각종 성인병 약을 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슴 아프게도 생로병사를 온몸과 온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본격적인 관절염과의 동행을 위한 약도 추가되었다.

약 한 줌을 삼켜야 할 때면 우울하기도 하지만 얼음, 우유, 커피, 아이스크림을 층층이 쌓은 아인슈페너를 만들어 마시고 나면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그러고 나면 내 남은 생의 질을 위해 다리를 고무 밴드에 걸어 이리로, 저리로 열심히 당기고, 벌려본다.

더욱 단단해진 허벅지와 햄스트링에 기분은 한껏 고무된다.

그리고 야구공보다 다소 작은 마사지 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짧게 짧게 연결되는 곳곳의 고통들을 참아내고 나면 내 몸 곳곳의 아우성을 잠시나마 잠재울 수 있게 되면

외출준비 끝!


Mt. Ainslie lookout(아인슬리 산 전망대)으로 나가는 여정은 단순하지 않다.

비가 오는지, 더운지 추운지, 바람이 많이 부는지는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하다.

양말 선택은 간단하지만 어떤 신발을, 어떤 인솔(insol)-소위 평발이라 잘 걸어야 편안하다-을 시험해봐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어제는 무엇을 신었는지 기억해 내야 하고,

어떤 이어폰 혹은 헤드폰을 들고 가야 할지, 물통은 가져갈지,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야 하는지, 이에 따라 카드를 챙겨야 하는지 참 많다.

물통은 가져가긴 귀찮고, 목이 마르면 가져올 걸 후회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마른 목은 참을 수 있고, 귀찮기는 무지 귀찮은 모양이다. 결국엔 딱 한 번만 가져갔었다.

전망대는 해발 843m에 위치하는데 서울의 웬만한 산들이 600~700m에 이르니 일상적인 산행으로 다소 고된 정도일 수 있으나 이곳 캔버라는 도시자체가 해발 580m라 250m 정도만 오르면 될 일이라 일상적인 산보 코스로는 딱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한 번 오르내릴 때 뛰어서 두세 번을 오르내리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의 육체미가 부럽기만 하다.


집에서 걸어서 시내를 관통한 다음 산에 올라 다시 집으로 오면 대략 10km 정도, 2~3시간이 소요된다.


다행히 이 짧지 않은 여정에 늘 함께하는 것들이 있으니 뭐니 뭐니 해도 그 첫 번째는 이 녀석이다.

Cockatoo는 질릴 만도 한데 볼 때마다 신기롭다.

Cockatoo

그네까지 보란 듯이 타며 노니는 모습이 신기하기 짝이 없다.

Cockatoo 그네타는 모습


현지 날씨는 여전히 30도를 웃돌아 생각보다 힘이 든다. 산을 오르는 여정이 길지 않지만 자주 뙤약볕에 노출되어 그런지 헥헥대기 일쑤다. 산을 오르는 다수의 남성들은 상의를 벌거벗은 채다. 이채롭지만 이제는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여성들 역시 마찬가지다. 체육관에서 볼 듯한 차림이나 심지어 가끔은 해변에서 볼 듯한 차림도 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인다. 한국에서 흔히 보는 기능성 아웃도어 패션을 소화하는 이를을 보기는 어렵다. 각자의 걸음으로 각자의 마음으로 걷거나 뛸 뿐이다.


한국에서 한 번은 설악산 울산바위 종주를 할 때다. 꽉 막힌 신발이 불편했던 나는 샌들을 신고 올랐고, 아무 일 없이 내려왔다.

하지만 정상에서 만난 멀쩡하게 생긴 젊은 여성 한 분이 내게 ”산에 대한 예의도 없이 어떻게 샌들을 신고 올라왔느냐? “ 나무랐다.


너무도 황당했다.

내가 무슨 환경을 훼손하기라도 했는지 …

한국에서는 산을 오르든 혹은 무엇을 하든 ‘이 정도는 차려입어야지.’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적인 요구가 있다.

그들과 비슷한 차림, 비슷한 생각을 가져야만 자연을 공유할 수 있는지 …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어야만 한강변을 달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 마냥. 참 피곤하게들 산다.


내가 특별히 이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유구한 역사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캔버라는 100여 년이라는 다소 짧은 역사이지만 여전히 변화하고 있다.

도시조성을 위한 100여 년 전의 국가계획, 국제 설계 입찰, 건설과 시대에 따른 변화와 현대화가 꾸준하고도 일관되게 진행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국권침탈시기에서부터 오늘 현재까지 도시가 살찌워지고 있는 것이다.

한 세대가 가고, 그다음 세대가 이어받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에게 역시 출산율 감소에 따른 인력감소, 이민 확대, 범죄 증가, 부동산 시장 과포화, 새로운 국가경제 수익모델의 확보 필요성 증대 등 그들만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단, 끊임없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명확히 진전하고 있는 저력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분명 그들 모두의 유산인 확고한 민주주의, 다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 환경유지 등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으며 그럴 자격이 있어 보인다.


이내 직업병처럼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며 우리네 모습을 반추해 본다.

우리 역시 국권상실, 전쟁, 폐허, 대량 시민학살, 군부독재, 여러 번의 민주항쟁, 고도 경제성장을 100년 동안 이룬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실로 놀라운 세계사적 사건이자, 유산, 역사를 가진 한민족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율 감소는 물론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자살률 세계 1위, 근로 중 사망자 세계 1위 등의 불명예와 오명은 우리의 현주소임에 틀림없다.


나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대한민국의 성장세와 나의 성장은 크게 닮아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왔고, 지금은 작은 나마 서울에 가족들이 살 집을 마련했고, 몇 년이면 완전히 내 집이 될 것이다.

아내와 함께 두 아들들이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

아들들은 웬만한 자기 일은 자신들이 스스로 해결한다, 아직은 내 성에 차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큰 불안과 우울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나 스스로가 더 성장하지 못한 부질없는 미련과 후회를 안고 있고, 여전히 나아지고 싶은 욕망과

연로하신 부모님 세대를 보고, 불안한 20대 아들들, 불안한 내 노후에 대한 해법으로 끊임없이 헤매고 있다.

무거운 삶의 짐을 자식에게만은 전가되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라지만

주체적인 대상이자, 나름의 행복을 찾아 자신만의 인생여정을 찾을 시간과 기회를 내 마음대로 제단 하지는 않는지

나와 다른 삶을 택한 자식들이 성에 차지 않는다 책망하지는 않는지.


평균에서 벗어날 때 받게 되는 온갖 차별과 불이익, 상위 극소수에게만 내리 쬐이는 햇살과 같은 관대함을 평생 경험한 내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평범함을 강요하고,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치 내 아버지가 내게 하신 것처럼.


갑작스레 아들이 내게 “무당딸이 무슨 죄인가?”라고 물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내 자식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나는 평생 자기기만적으로 살아왔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누구든 원하는 바를 얻을 권리가 있고,

어느 누구도 차별해서는 안되며,

너만 행복하면 된다고.

사실은 다 거짓말이다.

남 눈치를 적당히 보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자식에게만은

더 이상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와 그녀 가족 어느 누구도 죄를 짓지 않았지. “

“다만 직업에는 분명 귀천이 있고, 인생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고, 사랑은 잠시뿐 우리네 삶은 결국 ‘너희 아버지, 어므이는 므하시노?’에서 멀지 않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인데 왜 하필?”

“난 싫어.”


(좌) 2025년 현재-북동쪽(30도 정도)에서 남서쪽으로 바라보는 경관, (우) 100년 전 도시계획- 정북
산보를 마치고 나면


목도 타고, 허기진다.

타는 목과 허기는 그날그날 다르지만

요즘 같은 무더운 여름에는 초계국수나 미역 냉국수만 한 것이 없다.


‘시원하다.‘


이내 식후의 노곤함이 몰려온다.

고민해야 한다.

타협할 것이냐?

타협한다면?

꿀잠이다.

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낮에 조금이라도 잘라치면

한밤의 지독한 불면을 견뎌내야 한다.

심지어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불편하지만 쓰러지듯 수면에 빠져들게 된다.

한 두 번만 반복하면 어렵지 않게 일상이 망가지게 되고,

이는 외부와의 단절을, 이내 걷잡을 수 없는 고립, 괴리를 불러와

온몸을 불쾌감으로 감싸버리게 된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고, 걸어야 한다.

잠시의 휴식을 맛보았으니

새로운 와인을 마시기 위해 물어 마셔 내뱉아 청량감을 가져오듯

다시 움직여야 한다.

일상에서 나를 사로잡아두는 것을 찾지 못했기에.


늘 다니는 호숫가 산책로의 반대쪽 우거진 숲을 찾아가면

갈매기를 닮은 새와 함께 호숫가 낙조를 바라볼 수 있다.


인적이 드물고, 인공물이 언뜻 보이지 않는 우거진 숲은

막연한 두려움을 안겨준다.

토끼와 같은 동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 아이 종아리만 한 도마뱀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 아무런 의도 없이

자칫 경련이 날 정도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격렬한 반응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두려움을 누르고

내가 보지 못한 놀라움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해 질 녘 호숫가는 불타오른다.

태양이라는 놈은

쳐다보기조차 힘들게 맹렬한 빛을 발하더니

시나브로 세상을 붉게 물들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숨어버린다.

사체가 되어 냉랭하게 식어 버린 듯 어둠 속 처연한 빛으로 남아

내일을 또다시 도모한다.


정신 차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화려하다.



저녁은 뭐니 뭐니 해도

가족들 둘러 모여

삼겹살 구우며

하루하루를 녹여내고

다독이며

살아가는 맛이 최고이지 않을까?


삼겹살의 육질과 육즙,

다채로운 쌈,

밥과 된장찌개,

가족들 얼굴,

어려운 것이 아닌데 …


호주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 간단하며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기에는

새우, 스파게티 (혹은 빵), 와인만 한 것이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새우는

아무것도 가미하지 않은 채

천연의 바다 향과 맛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식재료임에 틀림없다.

그 달콤함이란 …



이곳 캔버라에서는 지나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듯 한밤의 성대한 Fireworks가 있었다.


얼마나 성대한 잔치인가? 뻥, 뻥, 뻥! 폭죽을 알리는 소리를 시작으로 잠시도 지루할, 익숙해질 틈을 주지 않기 위한 각양각색 다양한 악기로 이루어낸 리듬의 향연!


아쉽게도 불꽃구경이 마냥 즐겁지 않고 저녁노을처럼 사라짐에 서글프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더 행복해질 줄 알았지만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뭘까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밑도 끝도 없이,


하루하루의 소소한 일상,

살아 있음에,

호흡할 수 있음에,

먹을 수 있음에,

걷고 있음에 ,

쓸 수 있음에,


작은, 아주 작은

보잘것없는, 너무도 보잘것없는 것에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더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갈팡질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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