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멜버른의 상모 버스커>
나에게는 주체할 수 없는 끼가 있다. 공부만 할 것 같이 생긴 애가 축제 때마다 공연 하나씩은 꼭 한다는 이야기도 이제는 새롭지가 않다.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댄스, 노래, 수화, 패션쇼, 차력쇼, 꽁트까지 두루 무대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윽고 대학생이 되어 풍물패 '얼'이라는 단체에 속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다른 친구들이 북 치고 장구 칠 때, 열두발을 돌렸고, 취객 연기를 하였고, 거지 연기를 하였다. 나에게는 나도 주체할 수 없는 끼가 있다. 아무래도 선천적인 무대 체질인가 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러한 끼를 통제해야 한다. 나는 우리 집의 장남이고, 그에 준하는 일종의 의무이자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장남은 얌전하고 듬직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를 그렇게 길들여왔고, 또 그렇게 길들여졌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일컬어 이렇게 말한다. 차분하고 믿음직스러우며 섬세한 성격을 가졌다고. 그러나 나의 친한 친구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김정배만한 또라이도 없다고. 나도 인정한다. 나는 또라이다. 나는 내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창의력을 가진 또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또라이를 아껴야 한다. 장남은 또라이가 될 수 없는 운명을 가졌으니까!
한국에서는 아무도 나를 또라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몇 명만 나를 또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금 이곳 멜버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crazy guy, 혹은 funny guy라고 부른다. 나는 나를 이렇게 불러 주는 것이 매우 행복하다. 나는 이곳 멜버른에서 나 자신에게 더 솔직해 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이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한국에서라면 형, 오빠로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나의 마음을 많이 다스렸을 텐데, 여기에서는 나이 따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스무 살이든 스물네 살이든 마음만 맞으면 모두가 친구이다. 그래서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한국에서는 오직 마음이 맞는 동갑내기만이 나의 친구가 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장인석, 그를 나의 친한 친구로 생각한다. 나는 그를 참으로 좋아한다. 나보다 어린 친구이지만 참으로 보고 배울 점이 많은 친구이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인석이를 친한 친구처럼 생각해도 우리는 친한 형, 친한 동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인석이를 이곳 호주에서 만났더라면 우리는 지금보다도 더더욱 친한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음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릴 수 있었음도 유교의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유교의 많은 장점들만큼이나 유교의 단점들도 상당히 많이 존재하며, 그것 역시 우리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이다.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덕목은 개인의 개성을 두드러지지 않도록 교육시켜왔다. 모가 튀어나온 돌은 정으로 맞아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야 낭중지추가 나타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뭐, 그래 봐야 결국 이 글도 내가 이곳, 멜버른에서 또라이로 살아가는 데에 대한 변명으로 밖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괜찮다. 나는 이곳에서 더욱더 미친 척 인생을 즐기며 살 거니까!
-2013년 11월, 호주 멜버른에서의 어느 일기로부터
*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뒤, 그는 멜버른 시청에서 버스킹 퍼밋을 얻었고, 그렇게 <멜버른의 상모 버스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