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ve Scott
The Spoken Image: Photography and Language
CHAPTER ONE: THE NATURE OF PHOTOGRAPHY
스콧(Scott)은 비오이 카사레(Bioy Casare)의 소설 <라 플라타의 사진작가 모험>(1989)의 발췌문을 사용하여 사진가가 자기-표현(self-expression) 사진을 얼마나 많이 허용하는지에 대한 논쟁에서 두 가지 다른 입장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입장에서는 사진이 실제 세계와 접촉하는 동안 노출될 때 발생하며, 이는 사진가의 보고 예측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사진가는 세상에 그 자신을 강요하지 않고 우연을 이용한다. 두 번째는 노출이 사진을 찍기 전과 그 후 사이의 연결(link)이라고 주장한다(스콧은 이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예를 들어, 안셀 아담스는 암실을 사용하여 리얼리티를 증감(增感)하였고 디지털 사진은 실제와 사진의 연결을 약화시키고 있다). 두 번째는 셔터 속도가 너무 빨라서 사진이 다른 매체와 분리된다고 주장하며, 이 때문에, 빠른 속도의 사진은 또한 우연을 이용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진이 미학의 핵심 요소로서 우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와 연결된다. 스콧은 발터 벤야민, 수잔 손택,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이 연결을 지지한다고 언급한다. 그는 사진가 에두아르 부밧(Edouard Boubat)의 말을 인용하며, “나는 내가 발견한 사진들에 놀란다. 나는 풍경을 만들지 않는다. 이미 거기에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더 놀란다. 그저 눈을 뜨고 가끔씩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p.18).
사진에 대한 첫 번째 접근 방식에서는, 사진가가 우연을 예측하고 두 번째 접근 방식에서는 이에 반응하지만, 사진가는 두 가지 기술을 모두 필요로 하고 스콧은 기 르케렉(Guy Le Querrec)의 말을 인용하며, “나는 항상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에 놀라움을 느낄 수 있고 내가 예상했던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날카롭다.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놀라움 [...]. 중요한 것은 내 삶에 대한 감정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을 찍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p.18). 그는 또한 라르티그(Lartigue)가 초현실주의자들이 일상에서 마법을 보는 것처럼, ‘지나가는 경이로움을 포착하기 위해’ 찾고 있다라고 인용한다. 사진적 시각(seeing)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 (1) 사진가의 눈은 SLR 카메라이고, 뇌는 필름이다, 그래서 그의 카메라는 이미 본 것을 기록할 뿐이다... 예를 들어 르 케렉, 카르티에 브레송, 라르티그... (2) 카메라는 다른 종류의 시각이며, 사진가는 그 눈이 무엇을 드러낼지 배워야 한다... ’(p.19). 그는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하며, ‘눈으로 말하는 것과 비교하여 카메라로 말하는 것은 다른 성질이다...’(p.19).
카메라는 대등하지만 겹쳐진 현실(reality)을 본다; 우리가 문해력을 갖기 위해 채택해야 할 것은 현대 기술의 눈이다. 스콧은 모홀리-나기(Moholy-Nagy)에 의한 사진으로 인한 새로운 유형의 시각(vision)을 나열한다: ‘ ... 추상적인 시각(포토그램), 정확한 시각(르포르타주), 빠른 시각(스냅샷), 느린 시각(장시간 노출), 강화된 시각(마이크로 사진, 필터 사진), 꿰뚫고 들어가는 시각(방사선사진), 동시에 일어나는 시각(투명한 중첩) 그리고 왜곡된 시각(광학적 농담)’(p.19).
스콧(Scott)은 처음에 사진을 보는 데 방해가 되는 세 가지를 제시하고, 첫째는 침입적인(intrusive) 기능, 둘째는 피사체에 의한 사진가의 동일시화 또는 그렇지 않은 방식, 셋째는 언어에 의한 것이다.
침입적인 기능은 사진이 보는 것을 대체할 때 발생하며, 그는 관광객들이 무언가를 촬영하고 지나가는 것에 대한 손택의 예를 인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것을 식민지화하지만, 이 사진들은 현재와 관련이 없고 그들이 언제 볼 것인지에 대한 미래와 관련이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들이 여전히 경험을 인증한다.(See Memories Are Made Of This, Fig.42.)
만일 사진가가 신원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때 피사체가 사진을 찍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만일 사진가가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속임수와 관음증 문제가 있으며, 이는 특히 ‘ ... 다큐멘터리 사진의 매우 도덕적 세계 ...’에서 문제가 된다(p.20). 이상적으로는, 사진가가 신원이 확인되고 피사체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스콧(Scott)은 이것이 달성될 수 있다는 데 회의적이다. 일부 사진가들은 자신의 사진이 찍힌 것을 인지한 피사체와 사진가 간의 상호작용이 이미지에 가치를 더한다고 믿는다.
세 번째 방해 요소는 언어이다. ‘... 선-개념적(pre-conceptual)이고 선-해석적(pre-interpretive)인 것과 연관된 시각의 신선함’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언어를 강제로 제거해야 한다(p.20). 스콧은 폴 서루(Paul Theroux)의 <모드 프랫(Maude Pratt)>(Picture Palace, 1978)의 말을 인용하여, 말(word)이 특정한 일련의 사진들에서 단순히 주의를 분산시킬 뿐이라고 지적하며, 그녀는 끝으로 ‘아무도 음식(food)에 대해 풍부한 해석을 얻지 못했다 —그는 그냥 배가 고팠다’고 말한다(p.21). 이 점이 강점으로 보이지만, 스콧은 빅터 버긴(Victor Burgin)이 ‘시각이 (언어를 포함한) 나머지 의식과 어떻게든 분리되어 있다’는 가정에 대해 경고한다고 인용한다. 스콧은 이어서 모드(Maude)가 사진을 기록으로 사용하던 것에서 그 자체에서의 이미지로 이동했다고 지적한다. 언어를 부적절하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것이 이미지에 대한 욕구를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만일 사진이 그 자체로 이미지로 간주된다면, 사진가의 자기-표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레이밍, 셔터 스피드, 필름 및 인화지 선택 등의 과정을 통해 수행되며, 그 결과 사진가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그의 과정 숙달과 관련이 있다. 이는 결국 자기-표현과 실험적인 사진의 연결로 이어질 수 있다. <Photographic Tricks Simplified>(1974)의 스콧의 인용문이다; 저자들은 사실적(realistic)인 사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화가들이 19세기 후반 사실주의(realism)에서 벗어난 것처럼, 사진가들도 점점 더 실험을 하고 싶어한다. (필터, 입자, 포토그램 등)의 과정들은 사진가가 자신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표현형식으로, 이는 [그 사람에게 특정한 언어의 한 형태]의 개인 언어(idiolect)이다.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사진도 현실(reality)에 얽매이지 않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스타일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수단(resource)이다. 이 사고의 경향은 중립적인 사진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중립적인 사진은 그 자체로 선택이기 때문에 이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또한 다큐멘터리 사진이 그다지 실험적이지 않고, 표현력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암시하며, 스콧(Scott)은 ‘ ... 사진의 표현성(expressivity)은 기교보다 수단의 적절성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p.22).
역설적이게도, <Photographic Tricks Simplified>의 저자들은 사진의 실험적 경험론(experimentalism)을 아방가르드 회화와 연결시킨다. 사진을 회화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현대 기술이지만, 이와 같은 기술은 사진을 ‘화가 특유의(painterly)’것으로 만들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포토저널리스트, 스냅사진가(snap shooter)가 사진의 정신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진의 많은 관습(convention)은 예술에서 비롯되었고, 카메라는 드로잉 보조 장치,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발전했으며, 많은 초기 사진가들은 예술가였으며, 사진은 예술의 많은 역할(미니어처 초상화와 사실적 기록 등)을 대신하여 많은 시각적 ‘코드’(직사각형의 프레임, 르네상스의 원근법 등)를 사용했다. 하지만, 벤야민(Benjamin)과 같은 작가들은 그자체를 순수 예술이라고 주장하려는 사진에 반대한다.
사진과 회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혼란은 사진이 코드화되어 있는지 여부에 대한 혼란에 반영되어 있다. 그는 프랭크 웹스터(Frank Webster)가 사진을 피동적으로 지시하는 것(referential)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여 주장한다고 인용한다. 웹스터(Webster)는 사진을 선택된 후 세계에 대한 해석된 일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진가는 한 장면을 선택하고 해석하여 그것을 인코딩(encode)하고, 시청자는 그것을 해석하거나 읽음으로써 디코딩(decode)한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에서, 버거(Berger)는 ‘모든 이미지가 [...] 사진을 보는 방식을 구현한다는 것은 [...] 기계적 기록이 아니다. 우리가 사진을 볼 때마다, 우리는 사진가가 [...] 다른 가능한 광경 중에서 [...] 그 광경을 선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언급하며, 비슷한 지적을 했다. (p.23).
10년 후 <말하기의 다른 방식(Another Way of Telling)>에서, 스콧은 버거(Berger)가 코딩되지 않은 사진 쪽으로 약간 입장을 옮긴다고 느낀다. 여기서 버거(Berger)는 사진이 (번역할 수 있는 드로잉과 달리) 그것의 고유한 언어가 없기 때문에 외관(appearance)에서만 예시(例示)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버거는 <사진 메시지(The Photographic Message)>(1961)에서 바르트(Barthes)의 입장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여기서 바르트(Barthes)는 사진이 피사체의 코드로 가득 차 있지만 매체로서 그 자체의 코드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콧(Scott)은 바르트의 후기 연구가 다르게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카메라 루시다: 사진에 대한 성찰(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에서, 바르트(Barthes)는 자신이 현실주의자(realist)라고 주장하며, 사진에는 ‘[...] 특정 코드가 [...]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읽기를 굴곡시켜 수행하고 있다’는 코드(code)가 없을 수도 있다. 사진은 현실(reality)의 복사본이 아니라, ‘[...] 과거 현실의 발산이다: 마법이지, 예술이 아니다.’ 사진의 중요성은 그것의 ‘[...] 증거의 힘이며, 그 증거는 대상(object)에서가 아니라 제때에 [...] 인증의 힘이 표현의 힘을 능가한다는 것’이다(p.24).
바르트는 기호학자이지만, 그는 사진이 ‘말하기(speak)’를 할 수 있는 힘은 피사체와의 직접적인 접촉에 달려 있다는 매우 강한 개념을 수용하고자 하고, 따라서 공통된 문화 정보(바르트의 ‘스투디움’)의 일부로 코딩될 필요는 없다. 사진을 읽는 데 어떤 관습이 있든, 특히 전언어적(prelinguistic) 단계에 있는 바르트(Barthes)의 ‘푼크툼’은 여전히 남아있는 솔직함(directness)을 억누를 수 없다.
푼크툼은 <사진 메시지(The Photographic Message)>에서 설명한 ‘트라우마’를 미묘함(refinement)이다. 그것은 언어의 정지(suspension)와 절대적으로 외상(外傷)의(traumatic) 이미지에 직면했을 때 의미의 저지(blocking)이다. 이 진기한 이미지들은 “ ... 그 장면이 ‘실제로(really)’로 일어났다는 확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사진가는 그곳에 있어야 했다 ...”(p.24). 스콧(Scott)은 사진이 죽음과 같은 것일 필요는 없지만, 시청자가 ‘말문이 막힐 정도(speechless)’로 충격적인 것의 어떤 직접적인 리얼리티일 수 있다고 말한다. 바르트의 에세이 <세 번째 의미: 일부 아이젠슈타인 스틸에 관한 연구 노트(1970)>에서, 그는 ‘둔감한(obtuse) 의미’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는 기의(signified)가 없는 기표(signifier)이다; 다시, 바르트는 ‘... 언어에 의한 동화(assimilation)에 저항하고 객관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확립하려고 노력하고 있다(p.25).
‘푼크툼, 트라우마, 둔감한 의미 등 모든 종류의 시각적 경험은 우리의 첫 번째 버전의 사진 표현과 직접적인 물질적 연결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무의식적인 기억을 유발할 수 있다 ...’(p.25). 그것들은 개별 시청자에게 특정한 반응이다;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는 그의 어머니의 사진 한 장을 중심으로 행해지만, 아무도 그가 보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재현하지(reproduce) 않는다. 그는 푼크툼을 보고, 그들은 스투디움만 보게 될 것이다.
스콧(Scott)은 사진의 본질(회화적/비회화적, 코딩화/비코드화)에 대한 혼란을 ‘ ... 사진을 회화를 위한 기호학적 범주, 도상학적(iconic) 범주에’ 할당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p.26), 그는 이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케이티 웨일즈(1989년 런던, 문체론 사전)의 말을 인용한다, ‘사진, 일부 지도 기호 및 도로 표지판의 말하기(speaking)가 그것들의 표현에서 얼마나 정확한지에 따라 다양한 정도의 도상성(iconicity)을 가진다’. 스콧과 다른 사람들에게, 상대적인 정확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사진의 코드와 관습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리얼리티(reality) 자체에 의해 직접 생성된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언어 이론에서, 언어의 단위인, 기호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진다; 기의(signified)는, 정신적 구성 요소 또는 개념이고 기표(signifier)는, 소리-이미지 또는 문자 단어이다. 소쉬르의 경우 이 둘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언어들이 같은 것을 위한 다른 단어를 사용할 것이다.] 스콧은 웨일즈(Wales)의 설명이 기표(시니피에)와 기의(시니피앙) 사이에 자연스러운 연관성이 없다는 개념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본다. 기표(signifier)가 단어가 아닌 사진인 경우 피사체(지시대상)에 의해 즉시 만들어지며 직접 연결이 설정된다.
스콧은 프랭크 웹스터가 그의 <The New Photographer>(1980)에서 라킨(Larkin)의 시집 <The Less Deceived>(1955)에서, ‘젊은 여성 사진 앨범의 선들’을 인용하며 지적하고, 그것은 사진과 예술을 구별하고 사진의 경험적 진실을 주장하지만, 웹스터는 여전히 ‘사진은, 기호학이라는 용어를 채택하는 것, 즉 ‘도상적인(iconic)’ 의미의 방식’이라고 결론지었다(p.26). 제퍼슨 헌터(Jefferson Hunter)의 <이미지와 단어: 20세기 사진과 텍스트의 상호작용>(캠브리지, MA, 1987)은 또한 라킨 시에서 ‘ ... 수사학적 꾸밈 ... 벌거벗은 감정에 대한 방어를 시작하고 사진 촬영과 대조되거나 돋보이게 하기 위해’를 사용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스콧(Scott)은 우리에게 ‘ ... 사진의 힘을 무력화할 수 있는 감각’이 남아 있다고 느낀다 ... 우리는 반드시 과거에, 연속성이 차단된 채로, 이제는 어떤 “블라인드 필드(blind field)”(사진 프레임 너머의 공간과 시간의 확장)에도 무감각하기 때문에, 사진이 피사체에게 독특한 주권을 부여한다는 그 명제(proposition)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 피사체는 사진을 소유하게 된다 ... 관심 있는 시청자는 그 자신을 복종시킬 수 있다 ...’(p.26–27), 라킨의 글에서, ‘모든 면에서 당신은 내 통제를 위태롭게 한다’(p.27), 라킨은 바르트(Barthes)처럼 ‘매우 과거임(pastness)’, ‘거기에 있음(that-has-been)’, ‘사진들의’ 등에 대해 언급하며, 바르트와 같이 우연적인 디테일로 보이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바르트는 또한 사진이 도상적(iconic)인 것이 아니라 지표적(indexical)인 것에 속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왜냐하면 ‘사진의 지시대상(referent)’(주제)는 그 이미지가 선택적으로 지시하는 실제의 것이 아니라, 사진이 거기에 있기 위해 카메라 앞에 있었던 필연적으로 실제의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퍼스(C.S. Peirce)는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기호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의 기호학 체계에서, 지표(index)는 예를 들면 연기와 불과 같은, 그 주제와 직접적인 연관성(인과적, 순차적 또는 공간적)을 가진 기호이다. 그러나, 도상(icon)은 그 주제(subject)를 닮거나 모방하는 재구성이다. 사진의 기호가 지표인 것과 회화의 도상인 것 사이의 이러한 구별은 근본적이며, ‘행복한 스냅퍼(snapper)’가 갤러리에 걸려 있는 소수의 예술 사진가들의 작업보다 사진의 실제 기능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진을 지표(index)로 보는 것은 첫 번째 버전의 사진에 더 가깝고, 두 번째 버전과는 대조적으로, 이미지의 생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진정성(authenticity)의 개념은 사진의 지표적 성격에 대한 주장을 다시 강화한다. (a) 피사체, (b) 카메라, (c) 사진가 사이의 관계에서, ‘ ... 진정성의 보증은 (a)와 (b) 사이에 있다.’(p.28). (a) 피사체, (b) 회화, (c) 화가 사이의 관계에서, 진정성은 (b)와 (c) 사이에 있다. 사진에서 위조(faking)는 (a)와 (b) 사이에 있고, 회화에서 위조는 (b)와 (c) 사이에 있는 반면, 사진 프린트에서는 (b) 네가티브와 (c) 사이의 정확한 복사본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일 것이다.
스콧은 1859년 보들레르(Baudelaire)의 인용문을 사용하여 사진과 회화 사이의 두 번째 차이점을 설명한다; 역사를 표현할 수 없는 무능력(inability). 보들레르는 사진가들이 역사의 장면을 설정하고 촬영하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스콧은 예를 들어, 레일란더(Rejlander)의 <두 인생의 길(Two Ways of Life)>을 제시한다; 이는 우화적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다큐멘터리 이미지로서는 완전히 설득력이 없다. 그는 레일란더(Rejlander)의 추종자 헨리 피치 로빈슨(Henry Peach Robinson)이 역사적인 사진을 거부했다고 지적한다. 스콧(Scott)은 ‘사진은, 그 지시대상(referent)의 현재성(presentness) 때문에, 역사일 수밖에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시대착오적(anachronistic)인 것을 나타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시대착오적일 수는 없다’라고 결론지었다(p.29).
세 번째 차이점은 셔터 릴리스의 동시적인 특성이다. 셔터가 릴리스되면, ‘디지털 이전(pre-digital)’ 사진가가 이미지를 변경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 그리고 그때라 할지라도 사진은 피할 수 없는 주어진 것이다’(p.29).
이 순간은 진행 중인 것을 제외하고, 우연에 대한 사진가의 관계를 맡거나 우연을 이용한 기술을 개발하도록 장려한다. 그것이 순간적이기 때문에, 지표적 사진은 자발적일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사진가의 주관성이 드러난다. 스냅샷은 ‘...역사의 특정 순간에 내재되어 ...’ 있고, 사진가가 저항할 수 없는 사진 촬영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특정한 가치가 있을 뿐이다; ‘ ... 사진가가 자신의 주제를 표현하려는 내면의 욕구를 나타내는 기호(sign)’. 이 순간성(instantaneousness)은 벤야민이 ‘광학적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의 원인이기도 하다. 사진의 한 가지 정당화는 얼굴 표정에서부터 움직임의 매커니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고, ‘ ...이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세계의 열쇠’라는 것이 즉시성(instantaneity)이다(p.29).
편리함과 습관을 통해, 우리의 시각(vision)은 일반화되고 요약되지만, 카메라는 우리가 모든 것을 차별 없이, 바라보도록 강요한다. 초기 종이에 프린트된(paper-printed) 일부 사진 형식이 모든 디테일을 포착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들라크루아는 1859년 9월 1일자, ‘저널’에서 눈을 위한 ‘정지(靜止)’를 호의적으로 언급했다) 이것은 사실이었고, 에머슨(1856-1936)은 이를 예술로서의 사진 이론의 핵심 요소로 삼았다. 현대 평론가들조차도 ‘ ... 선택과 분리(abstraction) 과정에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p.30). 스콧(Scott)은 카메라의 네 번째 독특한 특징(사진가는 아니지만)이 미적, 표현적, 교훈적인 이유로 포함되지 않은 ‘무차별의(unselective) 보기’라고 주장하고, 이러한 디테일이 푼크툼을 유발하고 사진이 현실(reality)과 얼마나 명백하게 접촉했는지를 보여준다.
사진과 회화사이의 다섯 번째 차이점은 1880년대 코닥의 슬로건 ‘당신은 버튼을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합니다’로 예시되는, 사진의 ‘고유한(inbuilt) 아마추어리즘’이다. 스콧(Scott)은 화가가 기술을 습득하고 사진가가 그렇지 않다고 제안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만, 우연과 사진의 독특한 관계는 아마추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콧은 사진에서 다른 예술과 달리 사진의 노에마(의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전문가가 아니라, 아마추어라고 말하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한다.
스콧은 필립 뒤부아(Phillipe Dubois)를 인용하여 진정성의 개념으로 되돌아간다. 예술에서의 진정성은 독창성, 문체적 표현방식, 저자 및 서명에 의해 결정되었다.
사진에서, 그것은 ‘증명(사진 찍힌 것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는 것) ... 지시(사진은 그것에 대한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고 사물을 지시함); 특이점(사진들의 지시대상은 고유하며 한 번만 발생하며 —복제는 가능하지만 반복되지 않음)’에 의해 결정되었다(p.31). 이러한 특성 때문에, 뒤부아(Dubois)는 첫 번째 사례에서 사진의 의미가 의미론적(semantic)이라기보다는 실용적(pragmatic)이라고 주장한다, ‘... 그것의 주요 의미는 그것의 지시(reference)이다 ...’(p.31). 사진이 도상적이라기보다는 지표적이라는 개념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것으로, 그 기능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스콧은 가족 및 휴일 스냅샷의 예를 들 수 있다; 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자신의 사진이 기억의 대체물이 아니라, 기억을 돕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스콧(Scott)은 배타적으로 시각적인 관계를 일종의 현대의 질병으로 보고 있으며, 사진은 ‘찍는 것(taking)’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관음증은 카메라를 통해, 프레임을 통해, 창문을 통해 바라보고, 고립되고 페티시화되며, 경험의 연속성과 자신의 가시성(visibility)과 연결된 책임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카메라는, 사진가를 숨기고 있다고, 믿게 된다’(p.31). 19세기에, 보들레르는 포르노 입체경(stereoscope)의 인기를 비판했고, 스콧(Scott)은 그 입체경을 사진의 관음증의 완벽한 예로 본다, ‘... 이 장비는 시청자가 자신을 고립시키고 격리시키며, 눈에 보이는 것을 조작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p.32); 그는 투르니에(Tournier)의 <마왕(Erl-King)>에서 사진이 ‘ ... 사진 찍혀진 것의 소유에 관하여 ...’(p.32)라는 개념을 추가로 뒷받침하며, 화가가 공개적으로 작업하는 동안 사진가는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인용한다.
증거에도 불구하고, 스콧은 단순히 회화를 도상적인 것으로, 사진을 지표적인 것으로 분류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뒤부아(Dubois)는 사진이 지표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것을 사진을 실제(real)의 거울로 보는 것에서, 실제의 변화로, 그리고 마침내 실제의 흔적으로 보는 것으로 간주된 비판적 강조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스콧(Scott)에게, 사진에 대한 설명은 이 장(章) 초반에 설명한 사진 버전(version) 모두를 수용할 수 있음이 필요했다. 이 설명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사진을 지표적이고 도상적으로 볼 수 있다:
1. 시작부터, 사진은 ‘어느 정도(dose)’의 도상적인 것이 많기 때문에, 사진가는 노출 전에 렌즈, 필름, 필터, 근접성 등에 대한 결정을 극대화하여, 우연을 최소화한다. 이로 인해 사진은 노출되기 전에 현실(reality) 앞에서 내린 일련의 판단을 반영하게 된다;
2. 모든 사진은 이미지가 되어 지표적(indexical)에서 도상적(iconic)으로 이동할 뿐만 아니라, 지표적도 유지된다. 이는 사진의 상태가 네거티브와 프린트(프린팅 중 관계없는 변화; 종이, 화학 물질 등) 그리고 이후(마운팅 및 유포 등) 사이에서 변경되는 것을 수반한다.
그 가정에 따르면 네가티브는 실제 사진이고, 프린트는 버전(version), 즉 ‘메타-사진(meta-photo)’이다. 스콧은 투르니에(Tournier)의 <마왕(Erl-King)>에서 인용하여, ‘사진 이미지는, 논의할 여지없이 현실(reality)의 발산이며, 동시에 나의 환상과 동시에 나의 상상 속 우주와도 같은 수준의 동질에 있다’고 말한다(p.33);
3. 사진이 역사적으로, 오래될수록 사진이 어떤 상황에서 찍혔는지 말할 수 없기 때문에, 표현적인(representative) 역할을 보충한다. 그것들의 지표성(indexicality)이 남는 것은 푼크툼뿐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스투디움(교육적 및 문화적 가치 등)도 증가한다. 모든 사진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큐멘터리가 된다.
스콧(Scott)은 사진이 ‘...스냅샷에서 이미지로 변환되어, 기표(signifier)가 되고, 이제 지시대상(referent)뿐만 아니라 기의(signified)가 되어가는 ...’것의 변화를 나열한다(p.34).
(a) 그것은 문화적 독립을 얻고 그 자체로 기호(sign)가 될 수 있다.
(b) 그것은 이제 언어의 대상이 되었다. 지표적(indexical) 단계에서는, 언어가 사진 촬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제공할 수 없다. 지표적 단계에서 서술적인 언어는 동어 반복적(tautologous)이다: ‘이것은 풍차 옆의 소(cow)이다.’ 그러나 식별(identification)이 필요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나의 어머니이고, 저 사람은 나의 삼촌이다.’ 이 사진은 이제 유포되고 있는 이미지이므로, 무엇과 왜 그런지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언어는 이제 단순히 식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설명하고, 정당화하며, 시청자의 주의를 끌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가리키기 위해서(지표적, 도상적, 상징적) 요구된다’(p.35). 이 수준에서는 동어반복적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지표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의 문화적 독립은 문화적 시스템의 일부로서, 그 시스템의 코드에 묶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c) 그 사진은 단순히 외연(denote)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내연(connotation)의 의미도 가지고 있으며, 기의(signified)와 지시대상(referent)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코드화되어 있거나 코드화되어 있지 않다.
(d) 자기-표현(Self-expression)은 단순히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스타일이 된다. 진정성은 사진가를 지향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사진 스타일이 실제로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스콧은 손택(Sontag)의 말을 인용하여, 사진가가 특정 주제에 대해 찍은 일련의 사진들이 동일함을 증명할 수 있는 스타일을 가질 수 있지만, 사진가가 다른 주제로 이동할 때는, 그 사진가의 스타일을 인식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예를 들어 앗제(Atget)의 사진 중 상점 창문의 것과는 대조적으로 나무 사진을 제시한다. 이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콧은 스노든 경(Lord Snowdon)에 대해 ‘특정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는 ... 주목할 만한 사진가’라고 말하는 마이클 프리먼(Michael Freeman)의 말을 인용한다(p.36). 사진 이미지는 회화적 기법으로 인해 스타일에 ‘암묵의 요구(pretensions)’를 가지지만, 언어만이 사진 의도를 부여할 수 있고 그는 벤야민(Benjamin)의 말을 인용하여, “캡션이 사진(pictures)의 필수 요소가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p.36). 스콧(Scott)은 사진가들의 작업이 회화의 언어를 바탕으로 갤러리와 박물관에 이루어졌다고 지적하며, 이는 사진에 적합한 언어를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e) 이미지는 순간에서 동시적(instantaneous)으로 이동한다(사진이 순간일지라도). 스콧(Scott)은 시간과 지각의 동시적인 경험을 ‘디지털’이라고 설명하고, 순간을 ‘아날로그’라고 표현한다. 디지털 경험은 ‘ ... 심리적 또는 지각적 시간의 가장 작은 구분 ...’이다; 그것은 너무 제한적이어서 진행 중인 사건(event)에서 우리를 배제할 수 있다. 아날로그 경험에서, 순간은 서로 관계 속에서 경험되어 환유적(換喩的)이고 은유적인 특성을 부여하여,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순간을 확장하고, 더 큰 주관적(subjective) 존재감을 제공한다. 스콧은 이를 벤야민(Benjamin)의 체험(Erlebnis)(특정 인상의 ‘충격 요인’이 너무 커서 그 의식은 ‘... 의식의 정확한 시점에 그 경험을 부여하고, 그 내용의 완전무결함을 희생한다.’)(p.37) 개념과, 그리고 경험(Erfahrung)(경험이 인정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해되는’ 것. 사진을 지표적인 것에서 도상적인 것으로 옮기면 순간적인, 체험(Erlebnis)에서, 더 일반화된 더 효과적인 경험(Erfahrung)으로, 자유로워진다)의 개념과 연관시킨다. 스콧(Scott)은 다음 표를 사용하여 요약한다:
Indexical Iconic
Past reality Present use
Non-painterly Painterly
Uncoded Coded
Erlebnis Erfahrung
Instant Moment
Punctum (trauma, obtuse meaning) Studium
Prelinguistic Linguistic
(f) ‘시청자가 “블라인드 필드”에 대해 인식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은, 훨씬 줄어들고 심지어 근절될 수도 있다.’(p.34).
(g) 진정성의 개념은 (d)와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 때문에 더 어려워진다.
(h) 사진은 ‘ ... 우리가 반응하는 것에서 현실(realities)을 대체한다’는 의미에서 변화한다. ‘ ... 우리가 사물을 표현하는 방식은 ... 우리 자신에게 ...’, (p.34), 즉 이미지로.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스콧(Scott)은 베트남 전쟁을 예로 들었다. 사진적으로 생각해보면, 특정 이미지는 ‘시간에 의해 추출’되었으며 ‘전쟁에 대한 우리의 집합적인 감각...’을 나타낸다(p.38). 개인이 생각하는 다른 사진들과 상관없이,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한다: 응우옌 콩 우트(Nguyen Kong Ut)의 <네이팜탄 소녀>(1972), 팀 페이지(Tim Page) 및/또는 필립 존스 그리피스(Phillip Jones Griffiths)의 <트럭의 뒤에서 그의 죽은 여동생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소년>(1968), 론 해벌(Ron Haeberle)의 <총에 맞기 전 밀라이(My Lai) 마을 사람들>(1968), 돈 맥컬린(Don McCullin)의 <아내나 여자친구의 사진 옆에 누워 죽은 북베트남 군인>, 에디 아담스(Eddie Adams)의 <사이공 경찰서장이 베트콩 죄수를 즉결 처형>. 스콧은 사진가가 ‘... 이 과정을 예상하고, 보도(reportage)와 관련하여, 두 가지 “불순한(impure)” 형태의 사진 촬영(picture-taking) 중 하나에 참여하려고 할 수 있다: 사진가가 이미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이미지로 생각하여, 미적 인식이 사회적/도덕적 책임을 축출하거나; 또는 사진가가 이미 표현적(representative)이라고 생각하는, 사건이나 장면을 선택한 것이든: 다시 말해, 반동적(reactive) 접촉의 지표적 즉시성은 우리의 역사 인식을 형성하거나 예측하려고 하는 시각, (마음) 속의 동기를 가진 시각에 바친다... 그러나, 후자의 관찰이, 사진가가 자신의 의제(agenda)를 추구하는 것을 실격시켜서는 안 된다 ...’고 염려한다(p.38).
(i) 스냅샷으로서, 사진은 다른 예술과는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지가 되면 도상적인(iconic) 수준의 회화와 특징들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의 기술적 차이와 일반적 차이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둘 다 프레임이 있지만, 사진의 프레임은 캔버스가 아닌, 보기(viewing) 시스템에서 비롯되고, 이는 ‘구성적 가치’를 보증하지 않으며(p.39), ‘현실(reality)에’ 놓이면서 시청자는 ‘블라인드 필드’를 깨닫게 된다. 둘 다 단색(monochrome)과 컬러를 다른 ‘언어’로 사용하며, 이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회화에서, 단색은 ‘ ... (막스 클링거(Max Klinger)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의 작품에서처럼) 종종 정신(psyche)의 환상과 기억과 관련이 있고, 여백을 그래픽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주며, 색(colour)은 자연스러운 조화와 외향(extroversion)을 촉진하고, 공간을 채운다’(p.39). 사진에서의 단색은 진실, 양식화(stylisation), 사진 특유의 톤의 언어인 자기-표현(self-expressivity)과 연결되어 있지만, 컬러는 즐거움, 저속함, 산만함, 감정 및 접근성(accessibility)과 관련이 있다. 초상화는 사진과 회화 모두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을 포함하지만, 사진 촬영에서는 피사체가 사진이 찍히는 순간을 기다리며 독특한 ‘심리적 불안’을 겪는다. 이와 관련하여 미소는, 감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해 계획된, 관습이다. 회화에서는 감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사진은 회화의 장르를 공유하지만, 각 장르 내에서 세분화된 것의 수가 증가한다. 스콧은 사진 속 누드를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은 세분화된 것을 포함한다; 포르노그래피(브라케); 다큐멘터리(벨로크); 심리학적인 것(브란트); 왜곡된 것(케르테츠); 초상화(린드버그); 패션(뉴턴); 바이오모픽(라테건) 및 예술 누드.
퍼스(Peirce)는 세 가지 기호학적 범주를 가지고 있다: 지표적 범주, 도상적 범주와 상징적 범주.
앞서 지적했듯이, 지표적인(indexical) 것은 그 주제에 직접적인 연결을 가지고, 연기에서 불로, 도상(icon)은 그 주제(subject)를 닮았고 상징(symbol)은 단어처럼, 관습에 의해서만 연결되었다. 상징(symbol)은 주체와의 관계가 임의적이라는 점에서 소쉬르의 기의(signified)와 본질적으로 동일하고 그것들은 해석이 필요하다 [소쉬르의 기호는 즉 기의(signified)와 기표(signifier)인, 두 가지 요소만을 가진 이원성(dyads)이고, 퍼스(Peirce)의 기호는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진 삼원성(triadic)이다]. ‘상징적 코드는 언어의 코드이며, 시각적 요소가 언어 시스템에 더 많이 관여할수록 ... 의미론적 요소(‘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추상적 요소로 더 깊이 전달될 것이다’(p.40).
위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스콧(Scott)은 1865년에 제인 모리스(Jane Morris)를 찍은 존 파슨스(John Parsons)의 사진을 사용하여 1869년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화가 로세티(Rossetti)가 판도라를 그린 상징적인 분필(chalk)을 만들었다. 지표 수준에서 보면, 이 사진은 1869년 모리스가 대형 천막(marquee) 기둥(pole)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의 손, 특히 보호하고 싶어 하는 엄지손가락과 드레스 주름이 구겨진 것이 ‘외상적인(traumatic)’ 특징이다. 도상적인 수준에서, 그녀의 ‘ ... 구부정한 어깨, 손을 꼭 쥐고 고개를 숙인 것은 슬픔, 불안, 비밀스러움을 암시한다.’(p.40). 이 수준에서 구성요소들의 특징이 사진을 이미지로 확립하는 요인(factor)이 되는 것이다: 그녀의 머리 위에 끌어내리는 대각선의 선(line), 그녀의 굽은 자세와 대조되는 대형 천막의 기둥, 그림자를 외면하는 그녀. 그 분석은 상징적인 것을 다루기 시작했다. ‘왜 그녀의 손이 이런 식으로 꽉 쥐고 있나요? 그녀의 손과 표정과 자세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왜 그녀는 빛과 느슨한 공간, 즉 출구로 눈을 돌렸나요?’(p.41). 로세티(Rossetti)의 드로잉은 이러한 질문들을 연결하고 환원한다. 모리스(Morris)의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는,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번역하고 해석하고 추상화할 수 있기 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모리스가 판도라(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제우스의 복수)에서 형태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진은 우리에게 그 신화(myth)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 아첨과 교활함의 이미지가 아니라, 마지못해 하는 도구인, 그녀 자신이 가져온 악의 희생자이며 그녀는 숨기려고 하고 억누르려고 한다 ... 그 상징은 도상이 된 지표(index-become-icon)를 언어의 수중에서 더 깊이 전달하며, 이는 시각의 순수함(innocence)을 연상(聯想)의 기만적임(deviousness)으로 끌어들인다’(p.42).
스콧은 세 가지 범주의 기호를 사용한다; 지표, 도상, 상징은 어떤 장르의 사진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 나열한다. 지표(index) 아래에, 그는 포토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초상 사진, 포토그램, 포르노, 그리고 가족 스냅을 둔다; 도상(icon) 아래에, 패션, 누드, 포토스토리(photo-story) 및 풍경; 상징(symbol) 아래에, 우화(allegory), 포토몽타주 및 광고. 모든 지표 장르는 도상으로, 모든 상징 장르는 도상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도상적인 장르의 패션과 포토스토리는 다른 기호로든 이동할 수 있지만 누드와 풍경은 지표적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
분류는 다소 조야(粗野)하지만, 특정 경향을 드러낸다. 많은 도상적인 장르는 ‘ ... 불가피하게 지표적인 것을 상기한다; 예를 들어, 누드는 포르노를 초월하거나 승화된 것으로 간주된다. 상징적인 층(stratum)에서도, 지표적인 것은 계속해서 그 노력에 미친다; 예를 들어, 많은 광고 사진은 허구(fiction)로 인식된다 ... 판타지로 유인한다. 그럼에도 ... 그 사진은 상점에서 찾을 수 있는 지시 대상물(referent)을 가지고 있다’(p.42). 지표적인(indexical) 것과 연결하기 위해, 이러한 광고에는 종종 제품의 ‘직접적인(straight)’ 사진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며, 향수 광고는 이러한 접근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 맥락에서 사진의 모든 사용은 지표적인 것의 신뢰성(authenticity)에 달려 있다. ‘포토몽타주의 설득력조차도, 사진 구성 요소로서 초기의 ‘찍는 것(taking)’과 어떤 의미에서도 관련이 있을 수 없으며, 어느 정도는 사진의 내재적(內在的)인 증명하고, 증거가 되고, 드러내는 것에 달려 있다’(p.43).
스콧은 윌리 로니스(Willy Ronis)의 사진 센(Seine)강에서 <La Peniche aux enfants>(1959)을 통해, ‘ ... 우리의 관계가 도상적인 것에서 상징적인 것을 통해 지표적인 것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설명한다(p.43). 사진은 센(Seine)강의 굽이를 따라 예인되고 있는 네 척의 바지선(barge)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지를 지배하는 첫 번째 바지선은 비어 있으며, 그 안 깊은 곳에서 두 아이가 뛰어놀고 있고 줄에 매달린 세탁물이 있다. 저 멀리에는 사람들이 바지선을 바라보며 서 있는 다리와 강둑이 있다. 바지선을 끄는 배는 이미 그들 아래쪽에 있지만, 그들은 그 아이들을 볼 수 없다. 그 사진은 수상 수송의 거리나 늘 다니는 장소(backyard)를 볼 때 시각적인 충격을 주며, 뛰어노는 아이와 물살 사이로 순간적인(instantaneous) 느낌을 준다. 높은 카메라 각도를 통해, 제한된 시야로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몰입(self-engrossment)을 설명하는 것과 달리, 시청자는 강과 부두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부두에 있는 관찰자(spectator)들과 아이들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 모두를, 느끼게 해주는 두 번째 충격으로 이어진다. 카메라 각도가 높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진 공간에 있고 이미지를 내려다보며 우리에게 아이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부모성(parentality)’을 부여한다. 이미지의 밑바닥에 있는 외로운 세탁물은 또 다른 가능한 푼크툼(punctum)의 원천(sourc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