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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Nov 07. 2022

토머스 하디의 <테스>

영화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 <테스> 1979년

영화 <테스>(2016), 영화 <테스>(1998)     

여러 번 영화화 되었는데 첫 영화는 1913년에 만들어진 흑백 무성영화이다. 원작자 하디도 직접 보았다고 하지만, 이 영화는 현재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환상의 작품이 되어버렸다. 1924년에 2번째로 영화화되었고 이거 역시 하디가 직접 감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필름조차 지금은 남아있지 않는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1979년작의 테스 역을 맡은 나스타샤 킨스키로 유명하다.   

  

원제는 〈더버빌가의 테스〉이며 '순결한 여성'(A Pure Woman Faithfully Presented)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진실을 접했을 때 불쾌한 감정이 일어난다면, 그 진실을 감추는 것보다 차라리 불쾌감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현명하다”는 성 제롬의 널리 알려진 문구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다. (p7)     


이렇게 하여 일은 시작되었다. 그녀가 이 만남의 의미를 깨달았다면 그녀는 왜 그날 다른 남자가 아닌 잘못된 남자의 눈에 띄어 그가 탐하는 대상이 되는 운명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물었을 것이다. 왜 그가 모든 점에서 꼭 맞는 남자, 바람직한 남자, 인간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꼭 맞는 남자, 바람직한 남자가 아니었는지를 그녀는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만난 사람 가운데 이 유형에 거의 가까운 사람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그녀가 이미 반쯤 잊혀진, 지나간 인상에 지나지 않았다.

제대로 계획한 일이 잘못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부름이 올 사람을 데려오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시간과 일치하는 일이 거의 없다. 보는 것이 곧 행복한 일로 이어지는 순간에 자연이 “보라!”고 인간에게 말하고 인간이 “어디?”라고 외쳤을 때, “여기”라고 답하는 일이 드물다. 그러다 숨바꼭질은 지루하고 지치는 게임이 된다. 인간 발전의 절정과 정점에서 이런 모순이 보다 훌륭한 통찰력에 의해, 그리고 우리를 지금 덜커덩거리며 끌고 가는 것보다 더 짜임새 있게 운영하는 사회적 기구의 상호작용에 의해 시정될 수 있을지 우리는 생각해본다. 그러나 완전한 해결 방법은 예측할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지금은 수백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완전한 순간에 만나는 완전한 총체의 두 동강 난 반쪽이 아니었다. 사라진 반쪽은 나중 제시간이 올 때를 기다리며 둔감한 상태에서 혼자 지상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러한 혼돈의 기다림 속에서 근심과 실망과 충격과 재난과 스쳐 가는 운명이 일어난다.

<토머스 하디, 테스 1, P75-76>     


“경험에 의해서” 로저 애스컴은 말한다. “우리는 긴 방황 끝에 지름길을 찾는다.” 그러나 긴 방황이 우리의 다음 행로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경우 우리의 경험은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인가? 테스 더비필드의 경험이 바로 이런 종류의 무용한 경험에 해당된다. 테스는 결국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경험에서 배웠다. 그러나 이제 와서 누가 그녀의 교훈에서 얻은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녀가 더버빌 가로 가기 전에 자신과 세상 전반에 알려진 여러 가지 금언의 내용과 구절에 따라 살았더라면 그녀는 더버빌로부터 기만당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금언의 전체적 진리를 몸으로 느끼고 그것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테스의 능력을,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의 능력도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하느님에게 이렇게 풍자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당신께서 허락한 길보다 더 나은 진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한겨울 내내 닭털을 뽑고 칠면조와 거위에게 모이를 주고, 또 더버빌이 주었으나 매몰차게 던져 두었던 옷가지를 뜯어 동생들 옷을 만들면서 아버지 집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에게 편지를 쓰고 도움을 요청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어야 할 순간에 그녀는 종종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생각에 잠기고는 했다.

그녀는 세월이 회전하면서 중요한 날짜가 돌아오는 것을 냉철하게 적어 두었다. 깜깜한 체이스 숲을 배경으로 트란트리지에서 그녀가 파멸되던 끔직한 밤, 아기의 탄생과 죽음이 있었던 날들, 또 자신의 생일, 그리고 그녀가 관여하게 된 사건에 의해 특징 지어진 날들. 그녀는 어느 날 오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들여다보다가 이러한 일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날이 또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그것은 이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그녀 자신이 죽는 날이었다. 그날은 그녀가 해마다 그 곁을 스쳐 지나고 한 해의 나날 속에 은밀하고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전혀 표시를 내거나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날은 한 해의 하루 안에 분명히 들어 있었다. 그것은 어느 날인가? 왜 그녀는 이러한 냉랭한 관계에서 해마다 그날과 마주쳤을 때 싸늘한 냉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그녀는 제러미 테일러가 생각했던 대로, 그녀를 알았던 누군가가 미래의 어느 날 “오늘이 그날이지. 가엾은 테스가 죽은 날이지”라고 말할 것이며, 그런 말을 하는 그들이 마음속에 특별한 생각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끝없는 시간 속에서 그녀에게 종말이 올 그날이 한 달과 한 주와 한 계절과 한 해 중 언제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토머스 하디, 테스 1, P177-179>     

고국을 떠나와 있는 기간 동안 그는 정신적으로 십여 년은 더 성숙해졌다. 그는 이제 인생의 가치가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연민 속에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신비주의의 낡은 체계를 오래전에 벗어난 그는 이제 도덕률에 대한 낡은 평가를 버리기 시작했다. 그는 도덕률에 대한 평가가 다시 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덕적인 사람이 누구인가? 좀 더 적절히 말해서 누가 도덕적인 여자인가? 한 인물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그의 업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과 충동 속에도 있고, 그 참된 역사는 이미 저지른 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했던 것 속에 있었다. 

<토머스 하디, 테스 2, P205-206>     


테스는 정말로 ‘순수한 여인’인가? 그녀가 진정으로 ‘순수한 여인’이라면 어째서 당대의 법정은 그녀에게 교수형을 내리는 것인가? 테스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고, 살인에 대한 당대의 법적 형량은 교수형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내린 극형이라는 처벌은 빅토리아 조의 관행에 의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p327)  

   

 '기독교는 진부하다'며 비교적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배우자가 숫처녀가 아니라고 곧바로 사랑이 식어버리는 에인젤의 모습과, 개종을 하고 회개했다며 선교사로 변신한 알렉은 곤경에 처해 있는 테스를 다시 유혹하는 모습에서 두 남자의 행동들. 그리고 기독교 종교가 설교하는 사랑과 용서라는 점에서 무기력한 종교인들의 모습에서 더 화가 난다. 알렉은 대놓고 나쁜놈으로 나오는데 비해, 이 에인젤이라는 인물의 속성은 참으로 모순 그 자체이다.     

 

이런 시간에 숲으로 들어가면 그녀는 조금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빛과 어둠이 너무나 고르게 평형을 이루어, 낮의 압박과 밤의 긴장이 서로 중화되고 그래서 절대적 정신의 자유가 허용되는 정확한 저녁 순간을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알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불운이 최소한의 차원으로 축소되는 순간이 바로 이런 시각이었다. 그녀에게 어둠은 무서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오직 한 가지 생각은 인간을 -집단으로 뭉치면 그렇게 무서우면서도 하나의 단위 속에서는 그렇게 보잘것없고 불쌍하기까지 한, 세상이라 불리는 냉랭한 집합체를- 어떻게 피하는가 하는 것 같았다.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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