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용헌 Aug 22. 2023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영화 <상실의 시대>  2010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1988년 우리나라에서 번안 출판되었는데 판매량이 부진하여 문학사상사에서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바꿔 재출간한 후 대히트를 기록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번안된 제목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고, <노르웨이의 숲>으로 바꾸어 출간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1999년 현대의 휴대폰 걸리버 네오미의 광고에 등장한 것을 계기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럼 내 부탁 두 가지만 들어줄래?”

“세 가지 들어줄게.”

나오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면 돼. 두 가지로 충분해. 하나는, 이렇게 나를 만나러 와 준 것에 대해 내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하는 거. 굉장히 기쁘고, 정말로 구원받은 기분이야. 혹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말 그래.”

“또 보러 올게. 다른 하나는?”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물론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그녀는 말없이 그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을 햇살이 우듬지 사이를 뚫고 그녀의 어깨 위에서 반짝반짝 춤을 추었다. 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는 아까보다 우리 쪽으로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나오코는 낮게 솟아오른 언덕 같은 곳에 올라 소나무 숲을 벗어나서는 완만한 언덕길을 잰걸음으로 내려갔다. 나는 두세 걸음 뒤에서 그녀를 따랐다.

“나랑 같이 가. 거기 어딘가 우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녀의 등에 대고 말했다. 나오코는 멈춰 서서 방긋 웃더니 내 팔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남은 길을 나란히 걸었다.

“정말로 언제까지나 나를 잊지 않을 거야?” 그녀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나는 말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니.”       (P20-21)    

 

그런데도 기억은 어김없이 멀어져 가고, 벌써 나는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며 문장을 쓰다 보면 때때로 격한 불안에 빠지고 만다. 불현 듯, 혹시 내가 가장 중요한 기억의 한 부분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몸속 어딘가에 기억의 변경이라 할 만한 어두운 장소가 있어 소중한 기억이 모두 거기에 쌓여 부드러운 진흙으로 바뀌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이 지금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이미 희미해져 버린, 그리고 지금도 희미해져 가는 불완전한 기억들을 꼬옥 가슴에 품은 채 뼈라도 씹는 기분으로 나는 이 글을 쓴다. 나오코와 나눈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아주 오래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더욱 선명했을 때, 나는 몇 번이나 나오코에 대해 글을 쓰려 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처음 한 줄이라도 나와만 준다면 그 다음에는 물 흐르듯 쓰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도 선명해서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나치게 자세한 지도가 자세함이 지나치다는 그 이유 때문에 때로 아무 역할도 못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결국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생각뿐이다.   (P21-22)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말로 해 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 나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 덩어리로 몸속에서 느꼈다. 문진 안에도, 당구대 위에 놓인 빨갛고 하얀 공 네 개 안에도 죽음은 존재했다. 우리는 그것을 마치 아주 작은 먼지 입자처럼 폐 속으로 빨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죽음이란 것을 완전히 삶에서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 ‘죽음은 언젠가 우리를 잡아 챌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죽음이 우리를 움켜쥐는 그날까지 우리는 죽음에 붙잡히지 않는다.’라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도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편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 있는 게 아니다.   (P48)     

 

아무튼 난 내가 너에게 공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런 태도로 널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상처를 주었던 것 같아. 그렇지만 그러는 가운데 나 스스로도 방황했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어.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랬으니까. 만일 내가 너의 내면에 어떤 상처를 남겼다면, 그것은 너만의 상처가 아니라 나의 상처이기도 해. 그러니까 그 때문에 날 미워하진마.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야.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불완전한 인간이야. 그래서 더욱 내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 네게 미움을 받는다면 난 정말 산산이 부서져 버릴 거야. 나는 너처럼 자신의 껍질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가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야. 네가 진짜로는 어떨지 몰라도 내게는 어쩐지 그렇게 보여. 그래서 때로는 네가 굉장히 부럽기도 했고, 너를 필요 이상으로 휘둘리게 한 것도 그 탓일지 몰라.                   (P152-153)     

우리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그 뒤틀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사람마다 걷는 버릇이 다 다르듯이 느끼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 보는 방식이 다른데 그것을 고치려 한들 쉽게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고치려다가는 다른 부분마저 이상해져 버린다고 말이야. 물론 이건 아주 단순화한 설명이고, 그런건 우리가 품은 문제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난 어쩐지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어. 우리는 분명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 뒤틀림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뇌를 자기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 여기 있는 한 우리는 남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아픔을 당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뒤틀림’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이런 점에서 외부 세계와 이곳은 완전히 달라. 외부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뒤틀렸음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뒤틀림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야. 인디언이 머리에 자기 부족을 상징하는 깃털을 꽂듯이 우리는 뒤틀림을 끌어안고 있어.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사는 거야.    (P155-156)     

 

“어느 날 야간 정치 집회에 참가하기로 했는데, 여자애들에게 각자 야식용 주먹밥을 스무 개씩 만들어 오라는 거야. 정말 웃기고 있어, 완전히 성차별이잖아. 그렇지만 늘 문제만 일으키기도 뭐하고 해서 나도 아무 말 않고 주먹밥 스무 개 만들어 갔어. 절인 매실을 넣고 김으로 말아서, 나중에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고바야시의 주먹밥에는 매실 절임밖에 안 들었고, 반찬도 안 가지고 왔다고. 다른 여자애들 주먹밥에는 연어니 명란 같은 게 들었고, 계란말이를 곁들이기도 했다는 거야.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어. 혁명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인간들이 그깟 야식 주먹밥 같은 데 왜 신경을 써. 김으로 말고 안에 매실 절임을 넣었으면 일등급이잖아. 인도의 어린아이를 생각해 보란 말이야.”               (P305-306)     

“......모든 사람의 정의가 실현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이 달성되는 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카오스 상태에 빠지고 말죠.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게 정말 간단합니다. 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교통정리를 하는 거죠. 넌 저쪽으로, 넌 이쪽으로, 넌 저놈이랑 같이, 넌 거기서 잠깐 가만히 있어, 그런 식으로요. 배후 조정자 같은 거라고 할까요.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돼요. 이것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합니다.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에서는 자주 이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오는데, 바로 이 언저리에서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평가가 갈립니다.

만일 현실 세계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있다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곤란한 상태에 빠져 옴짝달싹도 못 할 지경에 있으면 신이 하늘에서 하늘하늘 내려와 전부 처리해 주니까요. 이렇게 편한 일도 없죠. 아무튼 이게 ‘연극사 2’입니다. 우리는 대학에서 대충 이런 걸 배워요.”    (P323-324)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이라 생각하면 돼.”

나는 몇 번 고개를 젓고 미도리 얼굴을 보았다. “내 머리가 나쁘기 때문일 테지만, 때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갈 때가 있어.”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그거 철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P419)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P453-454) 

    

그다음 우리는 매번 그랬듯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목욕을 하고 숨겨 두었던 좋은 와인을 따서 둘이서 마시고 나는 기타를 쳤어.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든지 <미셸> 같은 그 애가 좋아하는 곡을, 우리는 기분이 좋아져서 불을 끄고 적당히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어. 정말 무더운 밤이라 창을 열어도 거의 바람이 불어오지 않았어. 바깥은 시커먼 먹을 칠한 듯 온통 캄캄하고, 벌레 소리만 크게 들려왔어. 물씬 풍기는 여름의 풀 냄새가 방을 가득 채웠고, 그때 나오코가 갑자기 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             (P468-469)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너와 꼭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꼭 해야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이 세상에서 너 말고 내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너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어. 모든 것을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 하고 말했다. 

미도리는 오래도록 수화기 저편에서 침묵을 지켰다. 마치 온 세상의 가느다란 빗줄기가 온 세상의 잔디밭 위에 내리는 듯한 그런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창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P486)     

비틀즈의 1965년 앨범 러버 소울(Rubber Soul)에 수록된 곡;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

https://youtu.be/Y_V6y1ZCg_8

이전 04화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폭력적인 삶>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