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When Travel Becomes Life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건데 경험은 그때밖에 살 수 없다고 믿어서,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거나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돈을 아끼지 않는 성향이다.
그래서 여행을 자주 다녔다. 대학생 때는 죽어라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거나 아르바이트를 두세 개씩 하고 과외를 네다섯 개씩 하면서 돈을 벌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주기적으로 어딘가로 떠났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주말과 공휴일을 열심히 활용해 이곳저곳을 여행했고, 회사에서 안식휴가가 나오자마자 가족들 여행 비용까지 다 내가며 남미에 다녀왔다. 다행히 옷, 화장품, 전자기기 그 어떤 것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 지인들 선물 살 때나 책 살 때 외에는 돈 쓸 일이 거의 없다 보니, 그렇게 여행을 다녀도 돈은 또래 친구들에 비해 잘 모으는 편인 것 같다.
이렇게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흰머리가 희끗희끗 날 때까지 여행이 일상이고 일상이 여행인 삶을 사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됐다(내 꿈은 백 만개쯤 되는데, 이 꿈도 그중 하나다). 그리고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라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 나는 내 꿈을 살아냈다.
같이 지내던 일본인 친구 M이 아침 일찍 일을 나가면, 침대에서 조금 더 밍기적거리다 느지막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요거트나 계란, 치즈, 과일로 간단한 아침을 먹고, 숙소에서 제공해 주는 캡슐 커피를 내린 뒤 온라인 구글밋을 켜서 서로의 지지자이자 감시자가 되어주는 리추얼클럽 멤버들과 오늘의 할 일들을 차근차근 해낸다.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뉴스도 읽고,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새로 시작한 AI 봉사프로젝트나 UX 공부도 한다.
슬슬 다시 배가 고파질 때쯤 직접 장 본 재료로 파스타나 볶음밥 같은 점심을 해 먹는다. 회사에 다닐 때는 매일 대충 끼니를 때우는 게 습관이 되어 몰랐는데, 이곳에 와서야 내 손으로 재료를 고르고 요리를 하는 행위가 주는 기쁨을 알게 됐다. 대단한 요리를 한 건 아니지만, 내 몸에 들어가는 음식을 챙기는 것 자체만으로 나 스스로를 아껴주는 기분이 들었다.
할 일을 다 끝내고 밥을 다 먹고 나서도 오늘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한참 남아 있다. 어두울 때 집에서 나와 어두울 때 집으로 들어가는 직장인으로 살 때에 그토록 그리던 낮의 시간이다.
동네 도서관에 가서 한참을 고민하다 가장 끌리는 책 한 권을 골라 하루 종일 책을 읽기도 하고, 뉴질랜드 친구들을 따라 오클랜드 대학교 연구실에서 공부도 해보고, 헬스장에도 가보고, 관광객들은 한 명도 없는 로컬 맛집에도 가본다. 햇살 가득한 공원에서 커다란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 아래에 누워 낮잠도 자보고, 지나가다 홀리듯 들어간 요가 학원에서 한 달 치 수업을 등록해 버리고, 그날그날 가고 싶은 곳을 정해 근교로 당일치기 소풍도 다녀온다.
물론 이상적인 날들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온라인 수업이나 미팅이 많은 데다 과제도 해야 하고, 리추얼 모임도 챙겨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해서 하루 종일 집이나 카페에서 노트북만 붙잡고 있는 날에는 이럴 거면 왜 여기까지 왔나- 하는 생각을 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일상을 놓지 않은 덕분에 진짜 살아보는 여행을 할 수 있었다. 3주라는 시간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기 때문에 뉴질랜드의 랜드마크 한 군데라도 더 가보려면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녀야 했겠지만 나는 한 사람이라도, 한 골목이라도 천천히 깊게 알아가는 시간이 좋았다. 뉴질랜드의 모든 유명한 여행지를 다 가봐야겠다는 욕심을 버린 덕분에, 늘 부러워만 하던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일과 삶의 주도권을 내 손에 쥐고, 사람들과의 연결을 통해 기회를 만들며, 언어의 장벽 없이 어느 나라에서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로- 매일매일 다짐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