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타는 법

Ep13. Catching the waves

by 롤라

하나의 명확한 목표를 정해두고 그 궤도를 따라 걷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이를테면 대학생 때부터 마케팅이라는 직무를 하나 정해 관련 학회나 대외 활동을 꾸준히 하고, 이 경험을 살려 회사에 취직하고, 그렇게 탄탄하게 커리어를 쌓아 마케팅만큼은 끝내주게 잘하는 전문가로서 이름을 날리는, 그런 사람들.


퇴사노트 구독자분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난데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참지 못하고, 누가 봐도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루트로, 누가 봐도 비효율적인 결정을 하면서, 잘하는 게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뭐 하나 특출나게 잘하는 게 없는 채로 지금껏 살아왔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아마도 나는 80세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란 걸 받아들이고 나서부터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소 산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삶의 여정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대체로 즐긴다는 점이다. 모르긴 몰라도 훗날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들을 아주 다채롭게 보유한- 엉뚱하고 재미난 할머니가 될 자신은 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많이 왔던 그날도, 나는 굳이 혼자 저 멀리 섬에 다녀오겠다며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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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오클랜드 시내에서 페리를 타고 40분이면 와이헤케 섬에 닿는다. 각양각색의 와이너리와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한 작은 섬.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일정이 애매해서 계속 미루다, 마침 하루 비는 날이 있길래 비가 온다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숙소 밖을 나섰다.


페리를 탈 때까지만 해도 비가 안 오길래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차 있었는데, 섬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늘 그렇듯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고 온 터라 페리 터미널 앞에 멈춰선 첫 번째 버스에 무작정 올라탔다. 창밖으로 무섭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버스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그저 따라가다, 팜 비치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한 해변가 정류장에 내렸다.


오늘의 일정도 짜고 비도 피할 겸 정류장 앞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인상이 푸근한 카페 사장님께 최애 와이너리와 해변을 추천해달라고 말씀드렸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토니릿지 와이너리와 오네탕이 비치를 꼭 가봐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내 개인적인 여행 데이터에 따르면 이렇게 좋은 느낌이 드는 현지인들의 원픽은 대부분 옳다. 오늘의 여행 코스가 3초 만에 정해졌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으나, P의 여행답게 고난이 스멀스멀 찾아오기 시작했다. 오클랜드가 대도시이다 보니 교통이 워낙 잘 되어있어 방심했는데, 이곳은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 작은 섬이었다. 제주에서도 3년이나 살았으면서 섬에서의 환승을 너무 쉽게 봤다. 한참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 끝에 간신히 버스를 타고 구글맵이 알려준 와이너리 정류장에 내렸으나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데다 우산이 계속 뒤집어질 정도로 바람까지 세게 불어서 정신이 없다 보니 와이너리까지 걸어가는 길도 여러 번 잘못 들었다. 돌고 돌아 물에 빠진 생쥐마냥 쫄딱 젖은 채로 스토니릿지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나를 보고 당황한 직원을 마주한 후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공사 중이었다. 하필 내가 오기 조금 전부터 와이너리가 리모델링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쯤에서 좌절하고 돌아갔겠지만,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며 수많은 위기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해 왔던 나는 이 정도로 포기하지 않았다. 친절해 보이는 직원분께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와인 한 잔만 마시고 갈 수 있을지 여쭤봤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직원분은 매니저처럼 보이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나를 안쪽 자리로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큰맘 먹고 뉴질랜드에서 유명하다는 와인 세 잔과 가장 비싼 치즈 안주를 시켰다.


테이블에 앉아 비 내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맛있는 뉴질랜드 치즈를 곁들인 와인을 마시고 있으니 평화로운 왕국에 사는 귀족이 된 기분이었다. 와이너리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갈 뻔했는데 이렇게 와인을 마시고 있고, 심지어 궂은 날씨와 공사 덕분에 이 큰 와이너리를 전세 낸 것처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들에 감사해졌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으니 아쉽지만 비치 수영은 포기하고 와인 다 마실 때까지 책이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가져온 책을 펼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눈이 부셔 고개를 들었더니, 흐렸던 하늘이 말끔히 개고 어느새 해가 환하게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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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치자, 와이너리 밖 풍경이 완전히 새롭게 보였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오히려 모든 것이 근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날씨가 또 변덕을 부리기 전에 바다도 봐야겠다는 생각에 카페 사장님이 추천해 주셨던 두번째 코스 오네탕이 비치로 향했다.


그렇게 인생 바다를 또 한 번 만났다. 따뜻한 햇빛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을 바라보며 모래 위를 걸으면서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와인 세 잔의 힘까지 더해져 행복지수는 최고치를 갱신 중이었다. 혼자서 디즈니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뛰다 걷다 하면서, 바다가 가까이에 있는 곳에 집 하나를 사 두고 언제든 달려 나와 바다를 무대로 노래하고 춤추는 삶을 상상했다.


계속 걷다 보니까 슬슬 수영도 하고 싶어졌다. 바닷물이 차가워 망설이다, 이대로 돌아가면 후회할 것 같아 그냥 뛰어들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내가 들어가자마자 파도가 점점 더 높게 치기 시작했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 온몸에 힘을 주며 버티다 지쳐서 이제 나가야겠다- 하는 찰나에, 옆에 있던 한 외국인 커플이 서핑 보드 없이도 맨몸으로 신나게 파도를 타는 모습을 봤다.


파도에 맞서려 하지 말고, 타는 법을 배우면 되는 거였다. 어릴 때 파도풀에서 놀던 것처럼 물이 잠시 잠잠할 때 열심히 수영해서 앞으로 갔다가 파도가 치는 타이밍에 몸을 맡겨보니 이보다 신나는 천연 놀이 기구가 없었다. 파도는 일정한 규칙 없이 왔다. 높게도 낮게도 오고, 이쪽에서도 오고 저쪽에서도 왔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오늘의 우당탕탕 여행도, 내 좌충우돌 인생도 파도타기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두 주먹에 힘을 꽉 주고 앞으로 꼿꼿이 가려다 지치는 것보다는 물살에 몸을 싣고 이리로도 가보고 저리로도 가보면서 파도와 친해지는 편이 훨씬 나았다. 끝까지 방향을 완벽히 읽지 못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모를 재미난 파도들을 놓치지 않고 즐기는 게 좀 더 나다운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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