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덕후

Ep 15. My Life Between Bookshelves

by 롤라

새로운 여행지에 가면 무조건 가 보는 곳이 있다. 그 어떤 아름다운 건축물, 유명한 관광지보다 내게는 이곳이 훨씬 중요하고, 이곳을 가 보지 않으면 왠지 그 도시를 덜 본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바로 ‘도서관’이다. 나는 도서관을 정말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도서관은 내 놀이터였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틈만 나면 도서관으로 향했다. 책을 읽고 싶을 때뿐만 아니라 시험공부를 해야할 때도, 숙제를 해야 할 때도, 친구들과 놀고 싶을 때도 도서관에 갔다.


당시 내 기준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멋진 건물이었던 동대문구 정보화도서관이 우리 초등학교 바로 코앞에 새로 생겼을 때는 어찌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웠던지- 책만 많은 게 아니라 도서관에서 언제든 영화도 볼 수 있고, 옥상에 있는 예쁜 정자에 누워 바람을 살랑살랑 느끼며 친구들과 학교 숙제를 하거나 비밀 얘기를 할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미안할 정도로 내 친한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은 나 때문에 도서관을 아주 자주 가야했다..


동네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책들을 옆에 잔뜩 쌓아둔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 나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사를 하면서 전학을 몇 번 다녔는데, 두 번째로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는 그 학년에서 독서 기록장을 가장 많이 쓴 사람에게 상을 줬다. 이 상장이 나의 쓸데없는 승부욕을 자극해 준 덕분에 6학년을 졸업할 때쯤에는 400권가량의 독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이때 읽었던 책들이 나를 살게 해준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국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점수를 어느 정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 다른 과목 공부에 더 투자할 수 있었고, 대학교에 가서도 보통 친구들이 싫어하는- 책을 꽤 읽어야 하거나 글을 많이 써야 하는 수업을 오히려 즐기며 조금 더 수월하게 학점을 받아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어린 시절 집 가까이에, 학교 가까이에 있었던 도서관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 가도 도서관에만 들어서면 괜히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진다. 사람 사는 곳엔 언제나 도서관이 있고 도서관은 마음에 들지 않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내 여행은 대체로 만족도가 높다.

퇴사 후 떠난 뉴질랜드에서도 자연스럽게 도서관을 찾아다녔다. 뉴질랜드에 머무는 3주 동안 다녀온 도서관만 다섯 곳 정도 된다.


https%3A%2F%2Fsubstack-post-media.s3.amazonaws.com%2Fpublic%2Fimages%2F049e8866-f245-4987-81fb-0817664cf6d0_4096x2730.png Devonport Library / Central City Library @Auckland, New Zealand


오클랜드 공립 도서관에서는 영어 회화 모임이 무료로 열린다기에 참여했다가 일본어와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는 뉴질랜드 친구 B를 만났다. 한국을 좋아하는 뉴질랜드 현지 친구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용기를 내어 이날 바로 미술관에 가자고 제안했다. 이날 이후로 급속도로 친해져서, B가 다니는 오클랜드 대학교의 공학관 랩실에서 같이 공부도 하고, B의 오랜 친구를 따라 헬스장도 가고, 유명한 공원과 맛집 등 오클랜드 곳곳을 놀러 다니며 여행과 일상 사이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다.


또 다른 날엔 도서관 옆자리에서 공부하고 있던 미얀마 친구 N과 이야기를 하게 됐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왠지 결이 비슷한 친구인 것 같아 한 번 더 만나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공통점이 많고 성격도 잘 맞아서 수다를 떨다 보니 3시간이 훌쩍 지났다. 우리 둘 다 책을 좋아해서, 한국인의 자랑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 이야기를 한참 하다 결국 온라인으로 독서 모임을 하기로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영어로 N과 책을 함께 읽으며 서로의 문화를, 언어를, 감정을 다채롭게 공유하고 있다.


이 모든 인연이 도서관에서 시작되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도서관은 그 자체로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고, 이야기들은 사람을 이어주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내 도서관을 만들고 싶다. 단순히 책을 읽는 공간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작은 거점으로서의 도서관. 언제든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고 누구든 한 페이지를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 도서관 하나로 사람이 모이고, 문화가 살아나고, 지역이 다시 숨 쉬는 모습을 나는 실제로 보아왔다.

막연해 보이지만 사실 마음만 먹으면 작게라도 시작할 수 있는 꿈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책들, 친구들이 기꺼이 내어준 책들, 그리고 그 책들을 둘러싼 이야기와 사람들이 모이면 내 방 한켠도 작은 도서관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https%3A%2F%2Fsubstack-post-media.s3.amazonaws.com%2Fpublic%2Fimages%2F1106b9b4-2c78-42a1-99d7-684b16acab9e_1084x717.png Tūranga Library @Christchurch, New Zea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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