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Tough on the Rude, Kind to the Kind
대학 시절, 공연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었다. 만들어진 지 50년이 넘은 동아리인 만큼 전통을 유지해 오는 훌륭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아직까지도 선후배할 것 없이 애정을 가지고 활동하는 참 대단한 곳이지만, 내가 활동할 당시 우리 동아리에는 오랜 악습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당연하게 반말을 쓰고 때로는 소리를 지르고 불필요하게 과도한 벌을 주곤 했다. 오랜 친구 사이였어도 후배로 들어오면 관계는 달라졌고, 존댓말을 쓰며 위계에 맞게 행동해야 했다. 부득이 연습에 빠지거나 늦을 일이 생기면 회장, 부회장, 파트장 선배 세 명에게 각각 전화를 걸어 승인을 받아야 했고 전화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는 끊으면 안 됐으며 같은 사람에게 최소 세 번은 전화를 걸어야 했다.
나와 내 동기들이 선배가 되면 이런 규율들을 없애겠다고 다짐했지만, 가장 가까운 동기들을 설득하는 일부터 쉽지가 않았다. 그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노래와 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데 선배로서의 권위가 없으면 후배들이 말을 잘 안 들을 것 같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권위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선배다운 말과 행동을 보여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동아리에 늦게 들어왔다는 이유로,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구조는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가 나가면 그만이었겠지만,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동아리였던 만큼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 악습을 바꿔보고자 지난한 싸움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 일을 계기로 강강약약이 인생 모토가 됐다.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참지 못하고 맞서 싸워야 직성이 풀린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의 한 구절처럼, ‘왕궁의 음탕 대신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야경꾼에게 분개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몇 년 뒤 뉴질랜드의 한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또 한 번 인생 모토를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 일이 생겼다.
사실 숙소 예약 전부터 약간 쎄한 감이 있었다. 고민 끝에 숙소를 결정해 결제를 진행하려고 하니 호스트가 내게 따로 메시지를 보냈다.
“에어비앤비 말고 이 링크로 예약하면 5% 할인해 줄게요.”
클릭해 보니 개인 홈페이지였다. 알고 보니 에어비앤비 숙소만 50개 이상을 운영하고 있는 호스트였고, 본인 사업에 에어비앤비라는 플랫폼을 하나의 채널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식 플랫폼을 우회한 예약은 규정 위반이라는 걸 알았지만 굳이 따지고 싶지 않아 따로 전달받은 링크는 무시하고 정식 에어비앤비 플랫폼에서 결제했다.
숙소에 도착한 첫날, 예약 당시 숙소 소개 글에 적혀있던 것과 달리 드라이기가 없고 휴지도 부족해서 직접 사서 써야 하는 데다 와이파이 연결까지 종종 끊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원활한 와이파이와 일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다른 곳들에 비해 비싼 숙소를 고른 이유였기 때문에 당황했지만, 연결이 끊길 때는 어쩔 수 없이 휴대폰 데이터를 쓰면서 그냥 넘겼다.
어느 날 새벽엔 옆 방에 머물던 스위스 친구가 방문이 고장 나 방에 들어가지를 못했다. 친구가 핸드폰을 방에 두고 나온 터라 결국 내가 깨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주고 같이 해결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행 중 자잘한 불편함은 감수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으려 했다.
하지만 좋게 좋게 넘어가려 했던 나를 분노하게 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숙소에 있던 수건 하나를 잃어버려 호스트에게 내가 보상할 테니 금액을 알려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수건 가격으로 50달러를 요구했다. 마트에 가면 10달러도 하지 않는 수건이었던 터라 금액이 터무니없다고 느껴져 영수증을 주시면 돈을 드리겠다고 하자 물류/유통비까지 포함된 금액이라 영수증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체크아웃을 며칠 앞두고 있던 어느 날 호스트가 “내가 2주를 추가 예약했으니, 돈을 더 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 적 없으니 예약 내역을 다시 보라고 말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내역에 이름이 남아있어서 나 때문에 다른 사람 예약을 받지 못했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강하게 대응하자 이번에는 갑자기 침대에서 뭘 먹은 적도 없는데 “이불에 얼룩이 생겼다”며 추가 비용을 요구했다.
돈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운영하는 숙소들만으로도 매일 수백수천만 원의 돈을 쓸어모으고 있을 사람이 이렇게 행동하니 더 화가 났다. 함께 지내던 일본인 친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돈을 받아내는 못된 이 호스트를 가만두면 순진한 여행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당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호스트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어린 아시아 여성을 대하는 호스트의 무례한 태도가 느껴져도, 물러서지 않고 평소 내 말투보다 훨씬 강하게 대응하며 맞섰다.
그걸 본 일본인 친구 M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른한테 너무 세게 말하는 거 아니야?”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평소 말투로 했으면, 그 사람은 우리가 어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더 무시하면서 막 대하려 할거야.”
경험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멘토링이나 강의를 할 때에, 시작하기도 전에 여성 멘토 말고 나이 좀 있는 남자 멘토로 바꿔 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았다. 미팅하러 가면 외부 기관 관계자들은 늘 함께 간 남자 동료를 당연하게 나보다 더 높은 직급이라 생각하고 대했고, 남자 직원과 여자 직원이 같이 있으면 커피 부탁은 꼭 여자 직원의 몫이었다. 해야 하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끝까지 싸운 끝에, 결국 호스트가 요구한 돈을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숙소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 보상까지 받게 됐다. 무엇보다 이 과정을 지켜본 M이 해준 말 덕분에 이렇게 대응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누구에게나 항상 착하게 대하는 게 정답인 줄 알았어. 근데 너를 보면서, 나를 지키는 방법을 배웠어.”
이제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미소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대체로 친절함과 부드러움이 승리한다고 믿지만, 때로는 단호하고 냉정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부당한 일을 당했거나 내가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까지 항상 착하고 친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힘에는 힘으로, 다정엔 다정으로- 내 인생 모토는 ‘강강약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