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의 문법

Ep 17. The Grammar of Risk

by 롤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섬에 가는 것을 택했다.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어쩌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편안함보다는 모험, 안전함보다는 위험. 나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대학생 때 대부분의 친구들이 다녀오던 스페인이 아닌 과테말라와 멕시코를 선택했을 때도, 입사하자마자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제주로 떠날 때도, 넥스트 스텝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퇴사를 결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왜 나는 늘 이런 선택을 하는 걸까. 예측 가능한 것들을 버리고 매번 불확실성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유는 뭘까.


이전 회사를 다닐 때 개개인의 인생 키워드를 딱 한 가지 찾아내는 워크숍에 참여한 적이 있다. 수십 개의 단어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성장’이었다.


어떤 것들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절대 배울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야말로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는 데에 핵심적인 요소였던 것 같다.


남섬에서 맞이한 첫 위기는 번지점프였다. 이 나라 저 나라 여행을 다니며 수많은 액티비티를 해 봤고 세계에서 가장 무섭다는 놀이기구를 타러 언니, 동생과 함께 미국 원정까지 갔을 정도였지만, 번지점프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었다.


남섬 여행의 첫 도착지였던 퀸스타운은 액티비티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세계 최초로 상업 번지점프를 시작한 곳인 데다 남반구 최대 높이 네비스 번지점프가 있는 곳이라고 하니 꼭 시도해 보고 싶었다. 번지점프 외에도 스윙, 카타펄트 등 액티비티 종류가 여러 개였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돈보다는 경험을 택하는 게 내 방식이기에 전부 도전해 보기로 했다.


다른 액티비티들도 충분히 짜릿했지만, 번지점프는 차원이 달랐다.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내 몸을 이동시켜 주는 다른 기구들과 달리 번지점프는 오로지 내 의지로 뛰어내려야 했다.


번지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던 때의 느낌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와, 나 이건 진짜 못 할 것 같은데, 나 못 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저절로 이 말을 중얼거리게 됐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직원분이 포기해도 된다고 말했다. 괜찮다, 너무 무서우면 지금 그냥 내려와도 된다. 뛰느냐, 뛰지 않느냐는 내 결정에 달려 있었다.

순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우리가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가슴이 뛰는 무언가를 위해 안정적인 환경에서 벗어날 때-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그 누구도 등을 떠밀어주지 않는다. 결국 내가 결정하고 내가 뛰어내려야 한다.


그렇게 나는 무려 뉴질랜드에서 인생 첫 번지점프를 한 사람이 됐다. 플랫폼에서 발을 떼는 1초의 순간에 용기를 낸 덕분에,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하늘을 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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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스타운에서 남섬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렌터카를 인수받으면서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됐다. 우핸들 차량에 좌측통행. 전날밤 열심히 뉴질랜드 운전 영상을 보고 왔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 몸으로 익숙해지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처음 도로에 나섰을 때는 말 그대로 기어 다녔다. 뒤차들이 하나둘 추월해 지나갈 때마다 미안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심지어 방향지시등과 와이퍼 위치마저 한국과 정반대라서 한참 동안 깜빡이를 켜려다가 실수로 와이퍼를 작동시키는 바람에 여러 번 당황했다.


그런데 두세 시간 정도가 지나자 어색했던 것들이 자연스러워지고 도로 위에서의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다음날부터는 두려움이 싹 사라져 광활한 자연을 가진 나라에서의 드라이브가 이런 거구나를 느끼며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풍경 앞에서 언제든 차를 세우고 그 누구의 재촉도 받지 않는 시간 속에서 순간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 썼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성격상 분명 눈치를 봤을 텐데, 그럴 필요가 없으니 내 마음의 속도에 맞춰 멈추고 가고를 결정할 수 있었다. 언젠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끝없이 펼쳐진 남섬의 도로 위에서 창문을 활짝 열고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시속 130으로 달렸던 순간은 뉴질랜드에서의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았다.


운전을 하면서, 회사에서 일을 배울 때가 떠올랐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거나 처음 해보는 업무를 할 때마다 찾아오는 두려움과 긴장감- 나는 저 선배처럼은 정말 못 할 것 같은데, 싶다가도 눈 딱 감고 한 번 두 번 하다 보면 예외 없이 익숙해지고 어느새 내 무기가 된다. 해외에서, 그것도 한국과 반대 방향으로 운전해야 하는 나라에서 며칠을 혼자 운전하고 나니 이제 어느 나라를 여행해도 도전해 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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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섬에서의 시간을 통해 깨달은 것은, 나는 본능적으로 내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나도 사람이니 매번 무섭지만- 그 두려움을 뛰어넘었을 때 얻는 것들이 안전지대에 머물 때보다 훨씬 값지다는 걸 이제는 안다.


퇴사 후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돌아보면 결국 나는 계속해서 내 안의 두려움과 마주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진짜 내가 원하는 일과 삶의 방향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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