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사람들

Ep 19. Who I Owe Myself To

by 롤라

귀인을 만난 적이 있는가?


사주를 본 적은 없지만 사주명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천을귀인(天乙貴人)’과 ‘태극귀인(太極貴人)’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두 귀인 모두 아주 강력한 길신(吉神)으로, 전자의 경우 주로 위기 상황에 나타나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고 후자는 일상에서 꾸준히 도움을 주는 은인이라고 한다.


뉴질랜드 여행의 마지막 날, 그간의 여행에서 만난 내 인생의 귀인들이 떠올랐다.


나는 대학생 때도 무모한 편이었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면서 2학년 때 무작정 스페인어과로 전과를 했고, 온통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발음 하나도 제대로 굴릴 줄 모르는 채로 앉아있다 입도 한 번 뻥긋 못한채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장학금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현지에서 살다 오거나 오랫동안 스페인어를 공부한 친구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두세 배로 노력했지만, 점수는 어찌저찌 잘 받더라도 언어라는 건 사실 시험 점수와는 크게 관련이 없기에 자신감은 시간이 지날 수록 오히려 점점 사라졌다.


그 와중에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는 성격이라 공연동아리 임원에 학교봉사단장, 각종 대외활동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 4-5개에 온갖 알바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무쇠라도 몸에 탈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한창 시험기간에 동아리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던 어느 날, 자다가 눈을 떴는데 멀쩡하던 각막이 찢어졌다.


새벽에 급히 응급실에 갔다.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흘렀고, 누가 내 눈을 못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런데도 병원에 와서 내일 있을 시험 걱정, 과외 걱정, 알바 걱정, 동아리 걱정을 하는 내게 의사 선생님께서 계속 이런 식으로 무리하다가는 실명이 될 수도 있다는 무서운 말씀을 하셨다.


결국 나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휴학을 하게 됐다. 졸업할 때까지 받기로 되어있던 장학재단 장학금도 휴학을 하면서 돌연 취소가 됐고, 당시 동아리에서도 괜히 악습을 없애겠다며 나서다 많은 선후배동기들에게 욕을 먹고 있던 터라 그때는 세상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매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사람이 눈에 붕대를 하고 하루 종일 누워만 있으려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때 잠깐 쉬었던 게 사실 정말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게 참 필요한 경험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알지만, 어린 마음에는 불안함이 앞섰다. 한 학기를 쉬고 나니 감사하게도 다시 학교에 갈 수 있게 됐지만, 수업에 들어가는 게 두려웠다. 안 그래도 스페인어도 못하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따라잡을지, 등록금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학교 홈페이지에서 '과테말라 동문회 장학 프로그램'이라는 걸 보게 됐다. 과테말라가 어딘지도 잘 모르면서 꼭 이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왜 내가 가야 하는지를 온 마음을 다해 담아 적어 냈고, 그 마음이 닿았는지 우리 과에서 딱 한 명 뽑는 자리에 뽑혔다.


그곳에서 내 인생이 달라졌다. 그곳에서 만난 선배님과 친구들은 모두 귀인이었다. 우리나라와는 문화도 날씨도 언어도 완전히 다른 곳, 지구 반대편에서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여행을 하고 새로운 세상을 보면서 내가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삶의 가치관이 달라졌고, 내 전공인 스페인어를, 그리고 그 언어를 쓰는 중남미라는 지역을 사랑하게 됐다.


과테말라 장학 프로그램이 끝날 때쯤, 돈도 없으면서 멕시코에서도 꼭 한번 살아보고 싶다며 어떻게든 일을 구해보자는 마음으로 대책 없이 멕시코로 떠났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사장님께서 이야기를 듣더니 여기에서 일할 시간에 공부하고 여행 다니라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장학금을 주셨다. 어느 날 새벽에는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다 어쩔 수 없이 전화드렸는데, 아시는 의사분을 통해 나를 살려주시더니 병원비는 됐고 나중에 다시 만나면 간짜장이나 사달라며 기어코 돈을 거절하셨다.


멕시코 현지에서 기차여행을 하다 만난 멕시코 친구는 갈 곳 없는 나를 집으로 초대해 먹여주고 재워줬고, 여권을 잃어버렸던 어느 날에는 대사관에 계시던 얼굴도 모르는 선배님께서 퇴근도 미루고 여권 발급 비용까지 대주시면서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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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도 퀸스타운에서 만난 중년 부부가 또 내게 귀인이 되어주었다. 짧게 만나 함께 했던 시간 내내 나중에 나와 같은 친구들을 만나면 나도 이렇게 해주면 된다며 아낌없이 베풀어주셨다. 실제로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물건까지 운명처럼 찾아주신 덕분에 한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만났다. 이들을 보면서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누군가의 귀인이 되는 삶이란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드라마〈폭싹 속았수다〉의 명대사처럼, 사람 하나를 살리는 데에도 온 고을을 부려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지금의 나를 키우는 데에는 수많은 어른들이 있었다. 과테말라에서 만난 선배님들, 멕시코에서 만난 사람들, 수많은 선생님과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만난 부부까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귀인들이다.


뉴질랜드 남섬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받은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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