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의 꽃 사진을 비웃지 마라.
꽃은 어르신들의 카톡 프로필로 스테디셀러지. 어떤 젊은 친구들은 늘그막 한 부모님의 꽃 사진을 '꼰대'의 상징처럼 생각하며 비웃기도 하더구나. 우리 준이도 나중에 커서 꽃 사진에 심취한 아빠를 촌스럽게 생각하겠지?
그런데 절대 어르신의 꽃 사진을 비웃어서는 안 되는 거야. 왜인 줄 아니? 등산길 한켠 무심한 듯 피어난 들꽃을 보고 행복함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다는 의미거든.
애지 중지 키우던 자식, 하나 둘 품에서 떠나보내고 소꿉친구의 영정 사진 앞에서 목 놓아 울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 꽃의 아름다움을 논할 수 없는 거란다.
어르신들은 꽃만 보는 게 아니거든. 꽃씨가 바람에 실려와 황망한 들판에 뿌리를 내리고 모진 비바람 속에 꽃송이를 피울 때까지,
그 긴 여정에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인생을 투영할 수 있기에 꽃이 아름답다 말할 수 있는 거지.
그러니 젊은 너는 올레길에 멈춰 선 어르신을 답답하게 생각하여 발길을 재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카톡 프로필의 꽃 사진을 유치하다 생각해서도 안 되는 거고.
그 나이에만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들아, 그거 아니?
세상에는 정말 많은 즐거움이 있는데 꼭 그 나이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즐거움이 있다는 거? 어르신의 꽃처럼 말이야.
8살 우리 준이 동물 먹이 주는 거 좋아하지? 저번 양 떼 목장 갔을 때 너 울타리 앞에서 3시간 동안 있었던 거 아니? 한 100번은 풀 뜯으러 왔다 갔다 했을 거다.
그런 즐거움.
딱 네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거지. 지금 아빠보고 하라면 시급을 요구할 게다.
짝사랑에게 줄 편지를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애먼 볼펜만 만지작 거리던 절실함도,
첫사랑의 독서실 앞에서 초콜릿을 들고 섰을 때의 설렘도,
대학 합격 후 공부하던 책을 묶어 재활용 센터에 던져 버릴 때의 통쾌함도,
첫 해외여행을 떠나는 출국장에서 두근거림도,
퇴근하면 자식들에게 얼싸 안겨 뽀뽀 세례를 받는 행복함도, (지금의 아빠구나)
모두 그 시기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지. 나이 들잖니? 그땐 그 느낌이 아니야. 빛바랜 사진처럼 감정도 단조로워지거든.
그러니 지금 딱 네가 즐거운 것을 해야 해. 과거의 아련함에 살 필요도 없고 마냥 미래의 막연한 즐거움에 기대 살 것도 없어.
그냥 지금 딱! 너에게 즐겁고 설레는 것을 해야해.
꼰대는 타인의 즐거움을 폄하한다.
꼰대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겠지만 아빠는 이렇게 정의하지.
'타인의 즐거움을 비웃는 사람'
딱 그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첫사랑의 설렘에 한 껏 취한 아들 딸에게 부질없다고 말하는 부모나 새로운 프로젝트 기획에 가슴 뛰는 신입 사원에게 그거 해봐야 별 것 없다고 말하는 직장 상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야.
거꾸로 네가 어르신의 꽃을 비웃으면 너도 꼰대가 되는 것, 잊지 마라.
젊은 사람, 늙은 사람? 결국 사람이다.
아들아, 아빠가 오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세대 갈등이란다. 너는 앞으로 연령대별 혹은 출생 연도별로 씌워지는 프레임과 선입견을 자주 접하게 될 거야.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영감'이나 '젊은것들'이라는 비속적인 단어로 묶어 버리지.
물론 어떤 대상을 특정 기준(나이)에 따라 분류하고 일관된 특성을 찾는 대조적 사고는 과학 발전에 중요한 도구였다. 그러나 이를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오만이다.
아빠는 우리 준이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누군가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나이로 그 사람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그 사람의 경험과 처지에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사람을 안으면 세상은 좀 더 컬러풀해진단다. 아빠는 우리 준이의 세상이 두 배 세 배 더 아름답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랑한다. 우리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