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박, 차크닉보다 차독서
빈곤한 지식과 지적 허기짐으로 배를 곯는 이에게 제주는 진정한 축복의 땅이다. 배움의 행방이 묘연한 이는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같은 문턱 낮은 배움터에서 환대받을 수 있다. 제주는 무엇보다 도서관 인심이 후하다. 우리 집 근처에서 차로 10~15분 내외로 걸리는 도서관이 서너 개다. 용무가 있는 방향에 따라 오늘은 탐라도서관, 내일은 한라도서관, 내일모레는 좀 멀리 가보자, 한수풀 도서관. 이 외에도 수업하러 가는 곳 근처에 우당 도서관과 제주 도서관이 있고 주말에 송악산까지 가면 송악 도서관과 산방 도서관도 들를 수 있다. 지금 나는 한라와 탐라와 애월 도서관 세 곳에서 빌린 책을 동시에 읽고 있다.
테라스에서 먼바다를 관망하다 하늘이 예쁘다 싶으면 내처 바다로 달려간다. 제주에서 내가 사귄 바다는 협재나 세화처럼 멋들어진 이름이 없다. 지도에 이름을 달지 않은 해변, 소담한 마을과 잘 포개진 포구들은 대체로 한적해서 빈자리를 잠시 채웠다 다시 조용히 비워놓기 좋다. 무늬의 산책지가 될 수 있는 잔디밭이 맞닿아있으면 최고인데 열심히 발품을 팔아 넉넉히 찾아두어, 무늬는 매일 다른 잔디의 냄새를 맡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무늬와의 산책을 마친 후 차에 돌아와 앉은 뒤 창문을 다 열어본다. 커피의 부재를 채워줄 만큼의 꽉 찬 바람을 빈자리에 태운다. 적당한 구름이 햇빛도 슬쩍 가려 주고 있고, 바람도 좋아서 벌레 손님이 히치하이커가 되어 차에 올라탈 확률도 낮아 보인다. 이런 날은 무조건 차크닉, 아니 차독서다. 모름지기 운전대에 발을 올리고 책을 읽어야 제맛이다. 간간이 행인들의 발걸음 소리, 새 날갯짓 소리,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소리 속에 나는 가만히 멈춰 있다. 그리고 뒷자리에 작은 내 강아지의 고소한 냄새까지.
단어 기근이다. 갑자기 늘어난 수업에 하고 싶은 말을 쌓아둔 곳간이 동났다. 원래 쌓아둔 게 넉넉지도 않았지만, 서울에서 들고 내려온 단어도 소진된 모양이다. 게다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간 제주가 매일 새로운 모습을 보이며 시험에 들게 한다. 감각의 날을 세우고 이 풍경을 표현할만한 단어를 더듬어보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단어를 수집해야 하고, 문장을 배워야 한다. 이 막막함의 돌파구는 오직 독서다. 쓰는 이로 살며 희미하게 체득한 생존본능이다. 지금은 훌륭한 작가들의 멋진 문장과 표현을 빌려야 할 때다. 오늘은 이윤주 작가의 에세이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를 만났다. 가볍게 읽으려다 몇 장 넘기고는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작가는 모멸감을 주는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한다. 수시로 모멸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을 모멸하긴 쉽지 않을 거라며. '가장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달아난다면 더욱. 글은 내 안에서 시작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행위지만 결국 타인에게 닿지 않으면 일기, 내지는 낙서에서 멈춘다. 나는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나, 누군가의 응답을 기다리며 글을 쓰나. 이 책을 읽을 동안 이윤주 작가가 나눠주는 단어를 수집하며 고민해 볼 참이다. 다음 책은 폴 오스터의 <바움가트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