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를 쌓는 시간
베트남 직원들과 신뢰를 쌓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에서의 직장 문화는 상사와 직원 간의 명확한 위계와 권위가 존재했기에, 업무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야근과 회식은 때로 불편했지만, 그것도 일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이러한 권위적인 방식이 그리 효과적이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상사의 명령에 단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과 협력 속에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 중요했다. 처음에는 이러한 차이점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점차 그들과 협력하고 소통하는 법을 배워가며, 그들의 방식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신뢰라는 것이 급하게 이끌어갈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이었다. 한국에서처럼 빠르게 성과를 내기 위해 다그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관계를 쌓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물론 그동안에 한국에서의 모든 업무 대응은 주재원의 몫이다..
직원들과 신뢰를 쌓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업무 외적인 일상적인 대화였다. 처음에는 언어의 장벽도 있고, 불편한 식사 자리를 매일 이어가야 하나 싶었다.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 이 방법이 맞는지 의구심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베트남에서의 업무 성공을 위해 그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들과의 관계 형성이 사업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열쇠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매일 저녁 직원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해 가족들도 베트남에 오지 못했고, 나도 현지 생활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으니, 이 시간들이 나에게도 일종의 적응 훈련이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한국에서 회식은 상사가 주도하는 일이 많고 대부분 싫어도 가야하는 느낌의 회식이었다면, 베트남에서는 회식이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회사가 사주는 돈으로 자신들이 즐기기 위한 회식이 주가 되었다. 식사 때도 상사를 챙기기보다는 자신의 팀 사람들과 즐기기 바빴고, 가끔 사진을 찍을때는 서스럼없이 나에게 어깨동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회식의 마무리는 노래방!
모든 팀이 그런 건 아니지만, 베트남 직원들 대부분은 노래 부르기를 무척 좋아했다.
덕분에 나도 자연스럽게 베트남 노래 몇 곡을 외우게 되었고, 종종 노래방에서 이를 잘 써먹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이 베트남 노래를 부르는 것이 그들에겐 굉장히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면 주변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촬영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그들이 단순히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서야 나의 동영상이 회사내에 퍼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땐 당혹감과 부끄러움이 공존했지만...
베트남 직원들은 회식을 통해 상사와 편하게 이야기하고,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것을 즐겼다. 특히 노래방은 그들의 회식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하이라이트였다. 한국과 다른 점이라면, 베트남 직원들은 노래방에서도 역시 자신의 노래에 정말 집중한다는 것이다. 노래를 부를 때는 2절까지 반드시 완창해야 하고, 잠깐 한눈을 팔면 어느새 예약된 노래가 10곡을 훌쩍 넘어가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잘 적응이 되지 않았고, 언어 장벽 속에서 대화에 끼지 못하는 내가 마치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돈을 쓰면서 몇 시간 동안 소외된 듯한 상황이 불편하게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면 부족한 영어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나 역시 어설프게나마 베트남어를 흉내 내며 한바탕 웃고 나면 어느새 우리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베트남에서의 인수 이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마케팅 팀장이 갑작스럽게 퇴사하면서, 경험이 부족한 신입과 주니어급 직원들로 이루어진 마케팅 팀이 혼란에 빠졌다. 이때 나는 직접 팀의 공백을 메우고, 10명의 마케팅 팀원들을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트레이닝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일간 회의를 진행하며 각종 마케팅 자료를 직원들과 공유하고, 계획 수립부터 캠페인 실행까지 단계별로 교육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언어의 장벽이 느껴져서 이들이 과연 이해하고 있는지 걱정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새로운 지식과 방법론을 점점 흡수해갔다.
캠페인을 시작하기 전에 계획을 세우는 것. 각 계획별로 목적과 목표를 세우고, 디테일한 액션플랜과 스케쥴링을 하는것. 그 안에서 최대한 효율화를 검증하고 수정하는 것. 그들이 모르진 않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한 중요함과 효율적인 문서 커뮤니케이션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고, 문제해결 로직/협상 방법론 등 회사의 일을 넘어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내용은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로 그들이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3개월의 교육이 끝나고 새 마케팅 팀장이 부임했지만, 직원들은 팀장에게 신뢰를 보내지 못하고 나에게 직접 보고를 하겠다는 상황이 발생했다. 나는 직원들과 팀장을 모두 모아, 팀장에게 모든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공식적인 세레모니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후 그때 교육했던 팀원중 몇 명은 지금도 가끔 나에게 Zalo로 안부를 물어오며, 그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얘기할때면 괜시리 나도 뿌듯해진다.
베트남에서의 신뢰는 서두를 수 없는 작업이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직원들과의 관계 형성은 단순한 업무 이상의 과정이었다. 그들의 문화와 방식을 존중하며, 내가 먼저 다가가고 시간을 두며 쌓아온 신뢰는 결과적으로 더 깊고 단단한 관계로 이어졌다.
비록 초반에는 불편함도 있었고, 나에게는 낯선 경험들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베트남 직원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들이 나를 신뢰하고, 나 역시 그들에게 의지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진정한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베트남에서 쌓아온 이 신뢰는 단순히 일을 넘어, 함께 성장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