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욕망을 가장 정신없이 따라다니던 시절에도
목표를 구체적으로 만들어보자고
‘비전보드’라는 걸 만들었다.
그 ‘비전보드’는 구체적으로
계속 상상하고 그릴수록
꿈에 가까워진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걸맞은 사진까지 붙였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두면 된다고 해서
나는 이 비전보드랑 목표 자산이랑
해야 하는 일들까지 다 프린트해서
식탁 유리 아래 붙여뒀다.(진짜 실화)
식사하다가 우연히 저 목표를 보게 되면
당장 나가서 임장해야 하는데
밥이나 천천히 먹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밥을 빨리 먹곤 했다.
비전 보드의 방식, 자체는 좋았다.
프린트해서 곳곳에 계속 볼 수 있도록
붙여놨던 것도 좋았다.
문제는 주관 없이
그 당시에 좋다고 하는 것들은
다 찾아서 적었던 것이었다.
사실 지금 다시 보면
정말 남의 목표를 갖다가 썼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하나 뜯어보다 보면
웃음이 나오는 포인트들이 있는데,
한강 뷰 보이는 곳에서 살면
나와 남편은 출퇴근 시간이
차로 왕복 4시간이 걸린다.
누구를 위한 한강 뷰인지 알 수가 없다.
벤츠는 훌륭한 차이지만,
이 목표를 쓸 당시에는 차를
사실상 1년에 1-2번 운전할까 말까 했다는 게
웃음 포인트다.
남편의 조기 퇴직도 지금 보면 웃기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할 수 있는 몫과
일을 하면서 얻는 활력도 있다.
자산이 충분한 많은 은퇴자들도
무료함과 심심함으로
다시 일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남편을 왜 내가 억지로 퇴직 시키려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재테크 책과 강연을 통한 선한 기부자도
도대체 내가 뭘 원하며
그렇게 목표를 잡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재테크 책, 강연, 선한 기부자는
애초에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내가 원하는 것도 모르고
남들이 적어준 목표를
식탁에도, 냉장고에도 붙여두며
매 끼니마다 보았었다.
이제는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그려
스스로 적은 목표를 만들 때였다.
내가 도대체 뭘 원할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책상에 그냥 앉아 보니
뜬구름을 잡는 것 같이 막연해서
첫날은 [?] 물음표만 적고 끝이 났다.
앉아서 고민만 하고 노래만 듣다가
생각이 끝났던 것 같다.
첫날의 실패한 기억 때문인지
좀처럼 다시 앉아서 뭘 적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운전을 하다가,
실내 자전거를 돌리다가,
직장에서 걷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생각이 나면 한 번씩 다시 떠올렸다.
갑갑할 정도로 뭐라 적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내가 제일 자주 보는 어린이들이 생각났다.
어린이에게 "뭐 먹고 싶어?" 같은 질문을 하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다.
그 쉬운 걸 왜 말을 못 하나 싶은데,
오랫동안 어린이들과 같이 있다 보면 알게 된다.
어른들이 답답해하는 시간 동안
어린이는 정말로 고민하고 치열하게 생각을 한다.
자신의 마음을 뚜렷하게 생각해 내는 과정 자체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난 대학도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간 사람이었다.
고민이라고 해도
왜 그랬을까, 자책하거나
나 스스로를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을 때뿐이었다.
그걸 생각해 보니
나도 원하는 것 자체를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좀 오래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급해하지 않고 마음껏 뜸을 들이며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운전을 하다가,
실내 자전거를 돌리다가,
직장에서 걷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그렇게 한 번씩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