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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말7: 신화추종(히틀러), 무속추종(윤씨)

by 이인미

법률가 출신으로 홍보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주장되지만 12.3내란범죄자 윤씨가 실제로 추구하는 것은 '법'이 아니다. '무속, 주술, 역술'이다. 윤씨와 그 추종자들은 지금 '법 조문'의 빈 틈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법 조문에는 빈 틈이 어차피 있다. (법은 어느 법이든 제정되고 나면 계속해서 시대와 사회를 따라 개정을 거듭하게 마련이다.)


수시로 법을 운운하지만, 그들은 법을 추구하지도 법을 준수하지도 않는다. 그럴 생각도 없다. 날짜(거사일 등)를 택일받고, 방향(지역)을 따르며, 숫자 조합(수비술, 점성술)을 중시한다. 비합리적인 것, 신비로워 보이는 것을 우선한다.


2년 반 전 윤씨가 대통령 후보 당시 왕(王)자를 손바닥에 쓴 채로 텔레비전에 나왔다는 것, 그 이후 건진, 천공, 명태균 등이 윤씨 곁에서 윤씨를 위해 일했다는 것, 2,000 등의 숫자에 집착하는 것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1920년 나치당에 입당한 히틀러도 '법'이 아니라 '신화'를 추종했다. 히틀러 일당이 추종한 신화 중 가장 강력하고 대표적인 것은 '게르만신화'다. 게르만민족을 미화하여 지상 최고의 '민족'으로 놓고, 그 신화를 기초로 유대민족, 빨갱이(공산주의자), 동성애자, 장애인, 집시 등을 악마화(비인간화)했다. 그들은 이상도시 '게르마니아' 도시를 건설하려 했고, 게르만민족의 생활영역을 넓히려 했다. 유대인 학살정책(최종해결책)의 설계자 하인리히 힘러는 인종주의, 중세적 질서, 그리고 ‘흙'을 숭상했다.




윤씨 일당의 '무속추종'과 히틀러 일당의 '신화추종'은 의미심장한 공통점이다. 신화, 무속 같은 것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 취약한 사람들에게 효과를 낼 수 있다. 미래가 어떨지 궁금하고 불안한 사람들은 정해진 운명을 믿는다. 스스로의 정신적, 심리적 자산을 신뢰하지 않고 운명론이나 신화, 역술 같은 것에 끌린다. 뭔가 기댈 것, 의존할 것을 찾는다. '손 없는 날' 같은 징크스를 피하려고 일부러 애쓰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나치 문양 '하켄크로이츠'와 역술원이나 점집이 흔히 사용하는 '만(卍)'자는 비슷하게 생겼다. (좌우 반전, 90도 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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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와 1930년대, 나치 집권 초기와 중기, 마음이 약한 사람들 또는 막연하게 피해입은 것 같다는 느낌으로 힘들어하고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나치당 아래에 집결했다. 학력이 높은 자도 집결했고, 판사도 군인도 언론인도 집결했다. 소위 엘리트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나치 깃발 아래, 그것도 바로 아래로 앞다투어 몰려와 중심부분을 이루었다. 그들은 나치즘을 열렬히 지지했다. 이 문제적 나치즘이 끝나긴 했지만, 전체주의 이론가 아렌트는 비전체주의 사회에 전체주의가 도래하는 것을 두고 마냥 낙관해서는 안된다고 경계했다. 아렌트의 말이다.


비전체주의 세계의 사람들이
전체주의 지배를 맞이할 자세를 갖게 된 것은
한때 노년처럼 사회적으로 주변부적 조건에서
겪는 한계 경험(borderline experience)이었던
외로움이 이제 우리 세기의 점점 더 많은 대중이
매일 겪는 일상 경험(everyday experience)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기원> 중에서.


참고로, 인용문에서 ‘한계 경험’으로 번역된 ‘borderline experience’은 정신병리학에서 ‘경계선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BPD)’ 증상과 그들의 경험을 설명할 때 종종 사용된다.




나는 아렌트 연구자로서 우리 사회를 조심히 살피면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한계 경험으로서 외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지면 100여 년 전 독일사회의 '나치'라는 '병증'을 우리도 아프게 겪을 수 있다. 이번 12.3내란사태는 말 그대로 ‘아슬아슬’했다. 정말로 우리는 정신차려야 한다.


(이하의 글은 내용을 보완하여, 다음 호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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