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영 Sep 02. 2020

밀양 농약방집 딸들

경상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밀양 땅의 지형은 태백산맥의 영향을 받아 북동쪽이 높고 남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며, 북쪽에 가지산·운문산, 서쪽에 천왕산·덕암산, 동쪽에 천황산·재약산 등의 험준한 산들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은 모두 낙동강의 지류를 이루는데, 밀양강은 이 지역의 중앙을 남북으로 흐른다. 밀양강을 따라서 남북으로 길고 넓은 지역에 걸쳐 발달한 일명 삼문들이라고 불리는 하안 평야는 농경지와 시가지로 이용되고 있다.


밀양은 부산과 대구 간의 교통 요지이며, 도내의 주요 곡창지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 등 곡물 외에 사과·복숭아·감 등의 과수와 무·배추·풋고추·딸기 등의 생산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부산·대구 등지로 출하되고 있다. 삼랑진읍의 딸기, 무안면 등지의 단감, 단장면의 대추 등은 품질이 좋아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다. 또한 내이동에는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영남 작물시험장이 있어서 여러 가지 농작물을 시험 재배해 우수품종을 농가에 보급하고 있다. 과거 이곳에서 밀양 25호·30호 등 60여 종의 개량 벼를 내놓아 녹색혁명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자녀들이 주렁주렁 딸린 밀양출신 박대위는 군대를 예편하고 밀양 삼문동에 자리를 잡았다. 군인 박봉으로는 많은 아들과 딸들을 다 부양할 수 없어서 무언가 큰 돈벌이를 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채소의 씨앗을 채취하는 종묘업에 종사하는 친척 중 한 분이 박대위에게 종묘상과 농약방이 돈벌이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밀양의 넓은 논과 들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각종 씨앗이 필요했고, 병충해 예방을 위해서는 농약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밀양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박대위는 밀양 땅 주변 환경을 고려할 때 농약방이 가장 적합한 돈벌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선뜻 친지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보통은 전문 종묘사에서 생산한 씨앗을 도매로 떼어와서 마진을 붙여 소매로 파는 것이 일반적 종묘상이지만, 학식이 있는 박대위는 종묘를 직접 생산하여 팔기 시작했다. 여름에 감자를 싼 값에 사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씨감자로 팔았다. 겨우내 보관한 감자 중 일부는 썩고 말라서, 가족 모두 달라붙어 썩은 감자를 골라내고 싹이 돋는 부위 두세 곳만 남기고 감자의 남은 부위를 도려내야 했다. 감자 골라내는 작업을 마치고 나면, 도려내고 남은 감자살 부위를 몇 날 며칠 동안 삶아 먹거나 강판에 갈아 전을 붙여먹었다. 크고 붉은 잘 마른 고추는 가위로 도려 노란 씨앗을 발췌해 내고, 나머지 부위는 방앗간에 가서 갈아 고춧가루로 만들어 음식 요리 재료로 사용하였다. 여러 날 봄날에 먹는 삶은 감자는 쉽게 질리지만, 여름철에는 배부르고 행복한 고민도 발생했다. 크고 잘 익은 빨간 수박을 배 터지도록 먹었다. 달고 시원한 수박을 마음껏 먹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 씨앗을 발라 뱉어야 했다. 씨앗 한 알 한 알이 돈이 되니 무심코 삼키려고 할라치면, 박대위 아내는 자식들의 머리에 꿀밤을 주면서 씨앗을 뱉으라고 경고했다. 좋은 종묘확보를 위해 크고 탐스럽고 잘 익은 과일과 채소를 골라 씨앗을 채취하여야 했으므로, 가족은 늘 좋은 과일과 야채를 먹게 되었다. 이렇게 확보한 종묘를 조금씩 나누어 종이에 싸서 팔게 되니 낮은 원가로 고수익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농약방 운영으로 군인 시절보다 수입이 많아 가정 형편이 좋아진 박대위는 아내와 딸들에게 예쁜 옷을 사 입히고, 그 당시엔 귀한 전축을 사서 안방에 설치하고 딸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술 한잔 친 날에는 어깨에 줄 사탕을 주렁주렁 메고 와서 딸들에게 춤추고 노래해라, 재롱을 피워보라고 주문을 했다.   


농약방은 날로 번창해 갔고, 박대위는 밀양 땅 농부들의 농사 고민을 의논하는 상담사 역할을 해 주기도 했다. 매해 종묘 판매량 통계과 농업 고등학교의 이론적 지식은 박대위로 하여금 그 해 무엇을 심고 무엇을 가꿀지를 알려줄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했다. 농사짓는 데에는 오랜 경험도 중요하지만, 박대위의 권고를 따른 농부들은 매 해 농사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없어, 농부들의 박대위에 대한 신뢰가 높아갔다. 인근 부산과 대구에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공급할 수 있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놓인 밀양 땅에서, 박대위는 몇몇 지인들에게 비닐하우스를 설치하여 고추를 키울 것을 권했다. 늦가을부터 겨울을 거쳐 봄까지 싱싱한 고추를 근교 대도시에 공급한다면 고소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박 대위는 예측했다. 이것이 밀양에서 비닐하우스로 고추를 재배하기 시작한 최초의 시도였다. 현재 밀양에서는 비닐하우스 농사를 보편적으로 짓고 있다. 고추뿐 아니라 쌈배추, 깻잎, 딸기 등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넓은 삼문들에 하얗게 펼쳐져 있고, 비닐하우스에 의해 반사되는 햇볕 때문에 밀양 땅의 여름 기온이 전국 최고의 온도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밀양 비닐하우스 농사의 시작은 박대위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종묘상과 농약방이 번성하고 자녀들과 아웅다웅거리며 단란하게 살고 있던 어느 날, 박대위는 덜컹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의 나이 42살 때였다. 남편의 농약방 일을 거들며 행복하게 살아가던 최 씨는 청천벽력 같은 사고소식을 듣고 목놓아 울다가 기절을 하고 말았다. 그때 최 씨는 아들을 기대하며 아홉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 9남매의 막내가 유복자로 태어났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가정주부 최 씨는 남편을 그리워할 틈도 없이 박대위가 물려준 농약방에서 장사일을 익히며 9남매를 건사하느라 바쁘게 살아야 했다. 딸 여섯에 아들 셋, 자녀들 문제로 이웃과 다투거나 한꺼번에 여러 명의 학교 월사금을 내야 하는 때가 되면, 아이들 몰래 서럽게 눈물을 흘리곤 했다. 먼저 간 박대위를 원망하기도 했다.

최씨와 아들과 딸들. 사진을 촬영하는 첫째 딸을 합쳐 모두 9남매

장녀로서 늘 대우만 받아 왔던 큰 딸은 지어 8명의 동생들을 떠안아야 한다는 중압감에 사로잡혔다. 부모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 왔던 첫째는 그때부터 최 씨와 더불어 농약방을 운영하며 동생들을 돌보고 보살폈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타고난 기질 때문에 최 씨와 충돌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알뜰히 아끼고 절약해야 9남매가 먹고살고 학교에 보낼 수 있는데, 20대 초반에 들어서는 첫째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그에 걸맞은 지출로 최 씨와 부딪혀 불협화음을 냈다. 특히 농약을 외상으로 팔고 갚지 않는 밀린 돈을 받아오라는 최 씨의 심부름은 다 큰 첫째를 당혹해 하는 주문이었지만, 동생들을 거두고 보살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늦은 밤까지 골목길을 다니며 외상값을 받아 냈다. 많은 동생들의 사건 사고에 대해 박대위를 대신하여 처리했고, 둘째 동생이 학교 회장으로 뽑힌 날에는 소고기 국을 끓여 최씨와 함께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을 대접하기도 했다. 동생들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렸다. 첫째 딸은 대학을 포기하면서까지 동생들을 보살피며 첫째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였고, 결혼해서도 동생들을 끝까지 챙겼다.


둘째로 태어난 아들이 돌도 되지 않아 죽고, 셋째로 태어난 딸은 유난히 몸이 약했다. 둘째 아들을 죽음으로 보내고 난 뒤라 박대위와 최 씨는 딸을 지극히 보살피고, 알뜰히 사랑했다. 태어난 지 몇 개월 만에 젖을 떼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최 씨는 이 딸이 한 돌이 넘도록 품에 안고 젖을 늦도록 먹였다. 사랑 가운데 자란 셋째 딸은 재롱을 떨며 똑똑하게 자랐다. 중학교에 입학한 해 첫 시험에서 전 교과목 평균이 98점을 넘어 밀양여자 중학교의 역대 최고 점수라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중학교 1등의 평균점수가 93점 전후였으니, 최고 점수에 놀란 담임선생이 박대위에게 전화를 걸어 역대 최고 성적이라고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 날 저녁 박대위는 통닭을 주문하고 케이크를 사서 자식들과 떠들썩하게 잔치를 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박대위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 셋째 딸은 자신을 사랑하는 아빠가 없는 세상에 대한 실의에 빠져 학업에 대한 열의가 식어갔다. 그래도 밀양 여고에 들어가 학생회장 자리를 꿰차며, 당당히 자신의 꿈을 일구어 나갔다.


남편 없이 9남매를 키워낸 것만으로도 최 씨는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게다가 시골에서 대학생이 귀하던 그 시절에 딸 다섯을 대학에 보내고, 그중 4명이 나란히 국립 부산대학에 다닌다는 사실은 최 씨를 더욱 당당하게 만들었다. 똑똑하고 잘난 자식들을 둔 최 씨를 동네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그때부터 최 씨는 동네에서 발언권이 높아지고 음성이 높아졌다. 풍채도 좋아지고 목소리도 걸걸해졌다.


동네 사람들과 박대위 친척들은 과부가 9남매를 무탈하게 키우고, 어떻게 여러 자녀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는지 신기하게 생각했다. 수수께끼였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시골 농약방이 잘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을 대학을 보낼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지독한 절약과 자녀들 개개인의 눈물나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 첫째와 둘째 딸(원래는 셋째이지만 둘째 아들이 돌도 안되어 죽어서, 아래 형제자매들이 자연스럽게 둘째 언니, 둘째 누나로 불렀다.) 까지만 옷을 사 주었고, 나머지 딸들은 언니의 옷들을 내려 입었다. 옷을 물려 물려 입게 되자, 전체로는 일곱째인 여섯째 딸은 한 번도 새 옷을 입어볼 기회가 없어 온통 불만에 싸였다. 장사로 바쁜 최 씨는 매끼 9남매를 배불리 먹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손만둣국을 빚어 큰솥 가득 끓여 별미를 마음껏 먹게 하였다. 통닭도 두 마리를 시켜 9남매들이 나눠 먹게 했다. 닭다리 4개 중 두 개는 큰딸과 둘째 딸에게 주고 하나는 병약한 다섯째 딸을 주고, 나머지 하나는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여섯째 딸은 통닭을 먹을 때마다 행여 닭다리 하나가 자기에게 주어지기를 기다렸지만 끝끝내 먹을 수 없게 되자, 울며불며 닭다리를 달라고 생떼를 부려 보았다. 돌아오는 것은 매정한 최 씨의 눈초리일 뿐 얻는 것이 없었다. 울다가 보면 어느새 형제자매들이 닭을 다 먹고 남는 것은 닭뼈들 뿐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여섯째 딸은 통닭을 먹을 땐 아무 말도 없이 잽싸게 통닭 한 조개이라도 더 먹기 위해 급히 입을 놀렸고, 시선은 탐욕스럽게 닭다리를 뜯고 있는 남동생의 볼태기를 째려보았다. 최 씨는 아들을 지나치리 만큼 편애하였다. 최 씨는 통닭 닭다리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만들면 큰아들(전체 순서로는 여들째) 몫을 우선으로 챙겨 놓았고, 가끔씩은 아들을 딸들 몰래 불러내서 딸들 틈에 끼여 제대로 못 먹는다며 맛난 것을 사 주곤 했다. 그 당시에는 짜장면이 최고였는데, 최 씨는 종종 아들을 불러내서 짜장면을 사 주었다. 최 씨의 차별적 행위를 잘 알고 있는 딸들도 짜장면을 정말 먹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 씨는 국수를 뽑고, 짜장을 볶아 집에서 짜장면을 만들어 9남매를 배부르게 먹였다. 딸들은 맛있는 짜장면으로 배는 채웠으나 어디 중국집에서 먹는 짜장면 본래의 맛과 비교나 할 수 있겠냐며 여전히 최 씨를 원망했다. 여섯째 딸은 어느 날 학교 점심시간에 식사를 위해 도시락을 열어보니 반찬통에 날된장만 한 숟가락 퍼 담긴 것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고, 결혼 후에도 가끔씩 최 씨에게 항의조로 따졌다. 그리고 여섯째 딸은 자신의 아들 딸 도시락에 늘 최대한 신경을 써서 맛있고 보기 좋은 반찬을 가득 싸주었다.


집에 있으면 늘 빨래 해 놓아라! 밥 해라! 하고, 외상 돈 받아 오라는 당혹한 심부름을 시키니 딸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만 던져 놓고, 재빨리 몸을 빠져나와 친구 집에 놀러 가거나 삼문동 집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 예림 외삼촌댁에 가서 놀았다. 보건소에 근무하는 외숙모가 불쌍하다며 볼 때마다 먹을 것을 챙겨 주었고, 외삼촌댁 가까이 살던 둘째 외할머니가 외손주들에게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들려주시며 함께 놀아 주셨다. 특히 외삼촌 집은 밀양강 뚝방 밑에 위치해 있고 일제시대 때 만든 수로가 외삼촌 집 옆을 흐르고 있어서, 안전하게 수영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흰 뭉게구름이 깔린 파란 하늘을 보며 늦게까지 수영하며 놀다가 까맣게 탄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서 최 씨의 꾸중을 한차례 듣은 후 피곤으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딸들은 한 두 살 나이를 더 먹고, 이 가난과 복잡한 밀양 집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길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밤늦도록 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왔고, 토 일요일에도 공부한다며 아침 일찍 집에서 빠져나왔다. 공부하는 것은 최 씨가 시키는 일과 심부름에서 벗어나는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물론 최 씨는 농번기와 같이 바쁜 절기에는 학교 도서관까지 찾아와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딸들의 이름을 부르며 함께 일하러 갈 것을 강요했다.  

밀양강이 흐르는 언덕 위에는 아랑의 전설이 담긴 영남루가 우뚝 서 있다. 밀양시에서는 매년 5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아랑을 기념하기 위해 아랑제를 열고, 아랑을 선발했다. 삼문동에서는 인물이 반듯하고 학업성적과 품행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최 씨의 넷째 딸을 아랑 선발대회에 나가도록 추천을 했다. 하지만 최 씨는 넷째 딸을 선발대회에 내보낼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사실은 대회에 출전시키기 위해서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어야 하고 예쁜 한복도 몇 벌 구비해야 하는데, 그 돈이 없어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딸을 아랑 선발대회에 내 보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자신의 넷째 딸에 비해 용모가 많이 뒤떨어진 처녀가 그해의 아랑으로 선출된 것을 확인한 최 씨는 또 숨어서 눈물을 흘리며 가난을 원망했다.


농약방집 딸들이 대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비결이 있었다. 박대위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첫째 딸과 최 씨는 농약방을 운영해서 둘째 딸을 대학에 보냈고, 둘째 딸은 취업해서 돈을 보태 셋째 딸을 대학에 보냈다. 셋째 딸이 부산대학 재학 시절 때, 전두환 정권은 과외가 망국의 원인이라며 과외를 전면적으로 금지시켜 새째 딸은 더 이상 과외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던 셋째 딸은 부산 평화시장 옆 한 주택 집에 가정부로 들어가 갖은 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막일을 하지 않았던 셋째 딸은 남의 집에  들어가서 험한 일을 하여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서러워 언니들을 만나면 슬프게 슬프게 울었다. 다행히 심성과 손이 고운 셋째 딸을 알아본 주인아주머니가 가정부를 하게 된 사연을 묻게 되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가정부 일을 하게 된 부산대학 사범대 영어학과 재학 중인 대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주머니는 지금껏 가정부를 부리는 태도를 바꾸고, 가정부 대신 자신의 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 셋째 딸은 이렇게 학비를 벌어 대학을 졸업한 후 중학교 영어교사가 되었다.


셋째가 돈을 벌어 학비를 보태서 넷째 딸과 다섯째 딸을 부산대교 사범대학에 입학시켰다. 딸들은 대학을 입학했으나 부산에서 살 집을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부산대학 후문에 작은 방 하나를 구해 둘이 자취를 하는 동안, 둘째 딸이 결혼해서 부산 양정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공무원으로 동래구청에 다니는 직장 동료가 자신에게 구혼을 할 때, 둘째 딸은 부산대학 인근에서 자취하고 있는 동생들과 함께 살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동생들을 책임지겠다고 공언한 둘째 사윗감은 양정에 있는 방 세 개짜리 맨션을 부분적으로 임대해서, 안방 한 칸에는 주인 내외가 살고 방 두 칸에 신혼부부가 사는 것으로 계약을 맺었다. 이사 온 첫날부터 단촐한 신혼 내외가 산다고 임대해 준 방 두 칸 중 하나에 들어와 자리 잡은 큰 처녀 둘을 주인아주머니는 눈꼴사납게 여겼다. 다음날부터 주인아주머니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아침에 널었던 자기 가족들의 옷이 한쪽으로 밀려져 있고, 다른 빨래가 빨랫줄에 걸려 있었다. '내 빨래에 손대지 말고 가만두라'라고 했지만, 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빨래를 널어 말리기 위해서는 주인집 빨래를 한쪽에 거두어 놓는 것이 불가피했다. 며칠이 지난 후 주인아주머니는 외출 후 집에 돌아와 거실에서 처자들이 주인인 양 희희득거리고, 자신이 아끼는 주방용 그릇이 화장실에서 뒹구는 것을 보고 화를 불같이 냈다. 그동안 참았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언성이 높아지고, 주인장은 당장 방을 빼라고 주문했다. 신혼부부와 두 딸은 어쩔 수 없이 이사 1주일 만에 다른 방을 구해 이사를 하여야 했다. 주인장이 화장실에서 본 주방용 그릇은 사실 주인아주머니의 그릇이 아니라 신혼부부가 구매한 똑같은 모양의 그릇이었다. 주인장의 착각과 신혼부부에게 방을 임대해 주고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딸 둘이 더불어 온통 집을 차지하고 있으니 격분해서, 당장 이사 가라고 고함을 질렀던 것이다. 이사 온 지 1주일 만에 이사를 나가는데 가장 고생한 사람들은 동래구청 공무원들이었다. 무거운 동서가구를 등에 지고 이고 간신히 5층까지 옮겨서 이사해 주었더니, 1주일 만에 다시 낑낑대고 무거운 가구를 5층에서 1층으로 끌고 내려야 하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포장이사가 없던 그 시절은 누구나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을 불러 이삿짐을 나르고, 점심때 짜장면 한 그릇으로 수고비를 대신 때웠다. 물론 다음 이사 차례엔 스스로 가서 힘을 보탰다.


넷째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영어 선생이 되어 돈을 벌어 학비를 보내서 여섯째 딸을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시켰다. 한 번은 넷째 딸이 신학기를 앞두고 동생의 학비를 내고 난 한 달쯤 후에 여섯째 딸은 장학금을 받았지만, 언니에게 돌려주지 않고 그 당시 유행하던 조이너스 원피스 한벌과 구두 한 켤레를 사서 예쁘게 단장해 입었다. 박대위에 대한 기억도 없는 어릴 때부터 언니들에게 옷을 물려 입고 새 옷 한번 못 입던 여섯째는 비로소 제 손으로 옷 한 벌 사 입고 기쁨에 잠겨, 언니들의 꾸지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위의 딸들은 아직까지 남동생 세명을 학교에 보내야 하고, 그 쯤에 밀양에서 부산으로 이사 온 최 씨의 생활비를 나누어 부담해야 하는 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딸들은 하나 둘 짝을 만나 결혼을 하고, 남동생들이 학교를 졸업했다. 딸들 세명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딸 하나는 박봉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부동산 사무실을 열어 돈을 벌고, 여섯째 딸은 서울에 있는 토목회사에 취업을 했다. 여전히 최 씨의 생활비를 대고, 남동생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남편들이 든든한 회사에 다니고 있으니 더 이상의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다. 여섯 딸들은 결혼을 한 후에도 자주 모여 함께 여행을 다니며 우애를 다져 나갔다.


시간이 흐르고 딸들의 자녀들이 성장하자 이젠 자녀들 건사하기에 바빴고, 사회생활에 치이며 살다보니 전같이 딸들이 다 같이 만나는 기회도 줄어들자 서로 간의 관계도 소원해져 갔다. 여섯 딸들 중에 가까이 살거나 코드와 죽이 맞는 딸들만 서로 오고 가면서 자연스럽게 편이 갈리고, 오해로 말미암아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때로는 험담도 오가고, 나이가 들고 고관절이 내려앉은 최 씨를 누가 모실 것인가라는 문제로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지난 여름 최 씨는 나이 89세에 세상을 떠나 50여 년 만에 남편 박대위의 옆에 모셔졌다. 딸들은 최 씨를 그리워하며 저 나름 방식으로 추도를 하다가 딸들 간에 작은 충돌이 벌어졌지만, 부모는 위대한 법. 최 씨의 큰 은덕이 발휘되어 장례식을 마치는 시간에 딸들은 저마다 눈물을 글썽이고, 더러는 통곡을 했다. 자신의 잘못을 빌며 용서해 달라는 말을 차마 다 잇지 못했다. 딸과 아들들은 어릴 적에 박대위의 무덤가에 찾아와, 우리 커서 돈 많이 벌어 자가용 타고 아빠 곁에 다시 찾아오자고 했다. 최 씨가 죽어 박대위와 합장되는 날, 아들과 딸은 박대위의 무덤가를 찾아와 예전에 했던 그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가난했던 그 시절의 동기간 우정과 협력을 떠올리며, 지난날 갈등하며 소원했던 관계를 청산하게 되는 화해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결국 여섯 딸과 세 아들은 박대위와 최 씨의 자손으로, 한 뿌리에서 난 형제자매들 간에 재정을 나누고 협력하여 세상에 나갈 힘을 길러 각자의 영역에서 우뚝 섰다. 최 씨가 살아왔던 것처럼 자식들을 낳고 길러, 자손들이 세상에서 기반을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나이에 이르렀다. 최 씨처럼 경제적으로 힘들어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 할 형편도 아니고 자식들이 못 배워 배를 곯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젠 그동안 수고하며 함께 손잡고 지나온 예전 얘기를 나누며 형제자매간 옛정을 확인하며 평화롭게 우의와 애정을 나눌 때가 되었다. 한 때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했다고 서로 다독이며 곱게 나이가 들어가고 잘 익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눌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 씨가 세상을 떠난 후 맞이하는 첫 주 일요일에, 딸들과 아들은 밀양 첫째 딸 집에 모여서 최 씨를 그리워하며 추도식을 했다. 최 씨 둘째 딸의 큰 아들, 그러니까 최 씨의 외손주는 결혼을 해서 딸을 데리고 부산의 싱싱한 회를 한 보따리 떠 와서 온 식구가 맛있게 나눠 먹었다. 최 씨의 외종손은 넷째 사위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기 위해 조그마한 입을 모았다. '호' 소리만 나오고 입 바람은 안 나오자 촛불은 잠시 팔랑거렸다가 다시 되살아 났다. 첫째 딸 둘째 아들의 딸, 최 씨의 또 다른 외종손 하나가 후 불어 촛불을 껐다. 4대가 모여 최 씨를 그리워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농약방집 딸들은 뒷전으로 물러서고 그의 후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간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박 대위 여섯 딸들은 여전히 이 사회의 주요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고 열심히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지난날 의기투합해서 세상에 나갈 힘을 길렀듯이 세상 속에서 살다가 때때로 딸들은 다시 만나, 세상에서 겪는 피로를 풀고 더 여유로워지고 풍요로운 마음을 갖기 위해 의기투합할 것이다. 그리고 박대위가 남긴 군인의 기백과 최 씨의 인내와 담대함을 후손에게 전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박대위와 최 씨의 여섯 딸과 세 아들, 그리고 손자들과 또 그의 자식들이 모여 평화를 선언하며 함께 의지하며 사랑을 나누며 평화롭게 살아갈 것이다.




이전 07화 장례식은 축제의 장이 될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