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해찬이를 논산훈련소에 데려주고 왔다. 입소식을 마치고 연병장 한 바퀴 돌면서 부모와 친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해찬이는 부모를 향해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내 눈에는 수백 명의 입소자들 중에 유독 해찬이만 눈에 들어오던데 말이다.
회환이 밀려왔다. 해찬이가 중3 때 진로문제로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도 못한다며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항해사가 되기 위해 해양 마에스트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해양고등학교 졸업 후 배를 타서 수천만 원의 연봉을 받으며 안정된 직장을 다니겠다는 얘기를 제 엄마에게 했다. ‘항해사가 되려면 마땅히 해양대학을 졸업해서 1등 항해사가 되고 도선사가 되길 꿈꿔야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평생 하급직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면서 해양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평생 외항선을 탄 이웃과 해양고등학교 학교장을 만나 면담한 결과와 내 나름의 오랜 직장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예로 들어가면서 장래를 위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설득을 했다. ‘돈이 필요하면 내가 얼마든지 주겠다’라고도 했다. 해찬이는 계속 자신의 판단을 고집했다. 긴 설득과 고집은 마침내 심각한 갈등으로 대립되었다.
결국 해찬이가 집을 나갔다. 그 당시 나는 직장 관계로 대구에서 근무했고, 아내도 직장생활을 했다. 집을 나간 해찬이는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집에 들러 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지만, 밤에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해찬이의 얼굴을 한동안 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부산에서 대구로 출퇴근하면서 야간에 집과 학교 주변의 찜질방을 찾아다녔다.
중학교3학년 1학기 성적표가 날라 왔다. 반에서 2, 3등 하던 해찬이의 성적이 전교 꼴찌에서 두 번째로 떨어졌다. 나중에 들었더니 시험칠 때 정답을 비켜가며 답안지를 작성했다고 한다. 자기 딴에는 중학교 내신 성적이 떨어져야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러한 사항을 만들겠다는 의도에서 시험을 망쳤다.
해찬이는 해양 마에스트로 고등학교에 지원서를 냈다. 나는 입학 전형 당일에 해양고등학교에가서 면접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해찬이를 데려 나왔다. 눈물을 흘리며 따라 나오는 해찬이를 보는 나도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선택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나도 아비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자식이 섭섭했다. 어찌 아비가 자식에게 잘못된 길을 제시하겠는가?
해양 마에스트로 고등학교 진학이 좌절되자 해찬이는 학교조차 가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해찬이는 어쩔 수 없이 정보고등학교를 선택했다. 해찬이는 고1 때부터 자격증을 따기 시작해서 정보처리 기능사 등 6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학급 성적은 1, 2등을 차지했다. 고3 시절, 당시 인기 좋은 금융권에 입사를 지원했다. 2개의 은행 면접에서 탈락했고, 한국은행에서는 2차 면접에서 탈락했다. 같은 반 여학생 두 명은 시중 은행에 입사했다.
진로에 대한 의견이 갈린 이후, 해찬이는 나에게 어떤 일에 대해서도 상의 한번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했다. 스스로 용돈을 벌고, 스스로 의복을 사고, 혼자 식사를 해결했다. 성실한 생활로 나름 견고하게 제 인생을 준비하면서 자립을 키워 왔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취업을 하지 못했다. 해찬이는 취업이 가장 잘되는 학과를 찾다가 간호대학교를 선택했다. 한 학기를 다니다가 군대에 입대하기로 했다. 빨리 병력을 치러야 취업에 유리하다면서.
해찬이가 군에 입소하던 날. 부모의 역할에 대해, 특히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비로서 해찬이의 진로 설정 과정에서 빚었던 갈등과 상처를 봉합하지 못했다. 나 스스로에게도 깊은 상처로 남았다. 자녀들이 어디에 서있는지 둘러보고 다시 확인해서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섣부른 결정을 하려는 해찬이의 선택에 반대만 했을 뿐, 더 좋은 선택 안을 제시하고 끝까지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해찬이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고 힘든 날들을 보내다가 군대 입소하던 그날, 나는 아비로서 아들에게 마음의 빚을 많이 졌다고 생각했다.
군대를 제대한 해찬이는 간호대학에 복학했다. 피자집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던 해찬이가 어느 날 울면서 내게 항의를 했다. 중학교적 친구는 해양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연 3,500만 원을 받으며 배를 타고 있는데, 자기는 겨우 용돈 정도 벌고 있다며 늦은 사회 진출과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토로했다. 그러고 나서 4년 과정 간호대학을 그만두고 식품조리과로 전과했다. 취업은 쉬우나 급여가 낮다는 이유에서다. 빨리 학교를 마치고 해양 폴리텍 대학에 입학할 것이란다. 해양 폴리텍 대학은 전문대학 졸업 이상 자격자를 대상으로 1년 단기간 내 미래의 해양 관계 종사자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몇 번 요리경연대회에 참여하여 입상도 하고, 방학기간에는 호텔 조리부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다가 올해 2월에 대학을 졸업했다. 요리는 미련 없이 딱 끊고, 부산 영도에 있는 해양 폴리텍 대학에 입교했다. 항해사 과정 정원 35명 중 해찬이를 제외한 모든 지원자들의 나이가 30대를 넘었다고 한다. 유일하게 20대 초반인 해찬이는 나이 많은 형님들과 섞이는 것이 어렵다고 하면서 공부나 열심히 하기로 했단다. 지금껏 주말에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제 어미가 주말에 학교로 한번 찾아갈까 물어봐도 시간이 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밤낮 공부해서 항해사가 되는데 필요한 해양 관련기사, 정보통신기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매진하겠단다. 이미 정보통신기사는 취득했다.
중학교 3학년 때 ‘항해사가 되겠다’고 자신의 진로를 선언한 지 8년이 지난 올해, 해찬이는 본인의 희망대로 항해사가 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 예전 어릴 적엔 나의 보살핌 속에서 진로의 선택에서 갈등을 빚었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나의 굴레를 벗어났다. 결국 본인의 희망대로 항해사의 길을 선택했고, 결과를 스스로 감당해 나갈 것이다. 항해사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과거의 그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다시 그때의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학벌과 인적관계를 중요시 여긴다. 고졸로 살아갈 때의 경제적 궁핍과 낮은 직급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겪는 심적 고충을 해찬이가 가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지난 8년 동안 해찬이가 겪은 갈등과 고충을 생각하면 또 자신이 없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이성적인 판단은 본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대학을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구해서 화이트 칼러로 편안한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격정의 시기에 많은 시간을 나누어 갖지도, 함께 추억을 쌓지도못했다. 갈등이 있은 후 서로가 어색했다. 아비로서 다가서지 못했다. 같이 고민하는 날들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회환이 몰려왔다. ‘내가 아파하고 도움이 간절할 때 내 부모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절망했다’라고 한다면 부모는 어떻게 상처 난 자녀에게 변명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우리 부모도 너희들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해찬이가 어디에 있던지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길 원했다면 먼저 따뜻한 부모가 되어야 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시간은 흐르고 자녀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문득 깨달았을 때 저들은 이미 저만큼 떨어져 있다. 때때로 해찬이에게서 낯선 모습을 본다. 보모에 대한 친밀한 애정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날의 갈등이 패어 놓은 심연의 골을 극복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일찍부터 부모로부터 자립한 해찬이의 독립된 자아의 모습인가?
아들을 낳아 키우면서 자식과 함께 진로를 설정하는데 실패를 했다. 나는 아비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들은 몹시도 서러워했고, 긴 세월을 돌아왔다. 빨리 학교를 마치고 세상에 나가, 돈을 벌어 독립하고 싶어 했으나 원치 않는 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직업을 얻기 위해 준비 중이다. 해찬이가 성년이 되어 선택한 항해사의 길을 이젠 말리지 않는다. 지난날 동일한 선택으로 갈등을 빚은 것은 너무도 어린 나이에 내린 섣부른 결정이라 위험해 보였고, 장래의 삶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온전한 아들이 선택한 것이다. 본인의 책임하에 해찬이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의 선택을 지지한다.
그저 묵묵히 바라보면서 엉뚱한 옆길로 세지 않기를, 많이 아파하지 않기를 바란다. 도움을 청할 때 손을 꼭 잡아 줄 것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고 살갑게 행동하지 않지만 아비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