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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May 20. 2020

겨울 바다낚시를 가는 이유

부산 선상낚시의 메카 외섬

낚싯대를 드리운 지 6시간째. 입질 한번 없다.


차가운 겨울바다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굳은 몸은 꼼짝도 못 하고 시선만 초리대를 향하고 있다. 얼어붙어 감각이 둔해진 오른손은 바닷물에 젖은 낚싯줄을 살며시 잡아 어신을 기다린다.  


주위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외섬 등대는 어느 틈에 깜빡깜빡 불을 밝히고 있다. 여름철 이 시간이면 선장이 귀항을 서두를게 뻔하다. 하지만 물칸에는 고작 참돔 두 마리에 시장 왕고등어급 전갱이 한 마리뿐이다. 손맛 한번 보지 못한 꾼들이 여전히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니 선장은 감히 철수하자고 말도 못 붙이고 주저하고 있다. 고기를 많이 잡는 날은 낚시꾼들도 기막힌 손맛에 즐겁고, 선장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좋은 포인트에 배를 대는 기술과 축적된 경험을 뻐길 수 있고, 물칸에서 뱃전 가득 참돔과 부시리를 퍼올려 사진을 찍고 인터넷에 올려 많은 낚시꾼을 유혹할 수 있어 좋다. 대어 여러 마리 또는 어획량이 많은 사진은 며칠 동안 낚시 가겠다는 예약 손님을 몇 배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다.


'말짱 황'인 오늘 같은 날, 선장은 꾼들의 눈치를 살피며 귀항 시간을 늦춘다. 낚시꾼은 마지막 순간의 어신을 기다리며 낚싯대에서 긴장을 거두지 않는다. 선장은 기회를 더 주려하고 꾼들은 오랜 침묵 후 드디어 어신이 터질 것을 기대한다. 엄밀히 따진다면 지난 7시간 한 번도 소식이 없었는데, 해 떨어진 후 고작 몇 십분 연장했다고 해서 고기를 낚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누구도 물러 서려하지 않는다. 마지막 한 방을 꿈꾼다. 이대로라면 이 칠흑 같은 밤을 꼬박 지새울 태세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희미하게 새벽이 밝아 올 무렵에 터지기 시작한 어신들로 밤새 얼어붙은 몸을 깨우고, 거세게 저항하는 물고기를 제압하여 참돔으로 물칸을 가득 채울 것을 기대한다. 딱딱하게 굳은 몸이 풀리고 기선제압을 위해 힘을 쓴 이마와 팔뚝에 땀방울이 맺히고 온 몸에서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환상을 꿈꾼다. 물고기 한 마리도 없는 빈 바닷속에 새우 몇 마리 달랑 끼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면서.


모든 것이 얼어붙은 바다에서 오직 갈매기만 자유롭다.

현실은 새우 미끼는 다 떨어져 가고, 손가락은 굳어 낚시 바늘에 미끼조차 제대로 끼워지지 않는다. 몸은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한 체 미끼를 바꾸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의식은 살아있다고 하지만 '꼭 잡아야 한다'는 의지는 이미 상실한 상태다. 그냥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꾼들은 미동도 않고 낚싯대만 바라보고 있다. 선장은 담배만 뻑뻑 피우며 해 떨어진 먼바다에 시선을 주고 있다. 바다는 웅얼거리며 파도를 일으키지만 배 위에는 정적만 흐르고 있다. 오직 갈매기들만 이 배 저 배 오가며 집어를 위해 던져 놓은 그물망에서 새어 나오는 새우들을 채어 먹고 있을 뿐이다. 자유로운 것은 갈매기들 뿐이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흐르고 난 뒤, 포기를 모르던 꾼들 중 하나가 낚싯대를 접기 시작했다. '오늘은 영 글렸어' 한마디에 다른 꾼들도 주섬주섬 정리를 한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선장은 재빠르게 불을 밝히고 배를 고정시키기 위해 내려놓은 앙카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정말 오늘같이 입질 한번 받아보지 못한 날은 처음이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이렇게 말짱 빈 손이라니... 근래 한 두 달 동안 실적이 영 신통치 않았다. 작은  참돔 한 두 마리에 알 부시리 몇 마리. 한동안 다대포항 낚시를 접어 두었다가 바닷물이 따뜻해지고 붉은 돔이 피어나는 봄이 되면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지만, 낚시 가자는 한마디에 덩달아 따라나섰다.


많이 잡으면 좋겠지만 잡지 못해도 그만이다. 많이 잡으면 친구들 불러 회 떠서 나눠 먹을 수 있어 좋은데, 종일 파도에 시달린 몸으로 손수 회를 떠야 하는 번거로움은 감당해야 한다. 작년 초 겨울엔 몇 차례 그런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설탕과 초로 간을 한 밥 한술에 고추냉이와 크게 쓴 돔이나 기름이 잔뜩 찬 방어, 부시리 회 한 조각을 얹어 간장에 찍어 먹으면 입안 가득 감칠맛과 고소한 맛이 감돌았다. 함께 했던 친구들은 이 겨울에도 그 맛을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못 잡았다고 해서 안달이 나지는 않는다. 그냥 낚싯대를 드리우고 어신이 오길 기다릴 뿐이다. 무념무상으로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러면 덕지덕지 붙은  온갖 세상 잡것들이 떨어져 나간다. 파도에 묻혀 버린다.


그래서 잡는 마리수와 상관없이 겨울바다를 다시 찾아 나서는지도 모른다. 한 마리도 못 잡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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