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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Aug 27. 2020

장례식은 축제의 장이 될 수 있을까?

장모님 상,  이틀 삼일 째

병원에 도착했다. '운명하셨습니다'라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에 아내와 처형은 오열을 했다. 동서와 나는 먼 발취에서 눈물을 삼키며 저려오는 가슴을 훑어 내렸다. 잠시 후 도착한 처형과 처제는 발을 굴리며 목소리를 높여 통곡을 했다. 처남댁은 돌아서서 눈물을 닦으며 슬픔을 삭이고, 어느새 훌쩍  커서 대학을 졸업하고 몇 달전 미국에서 돌아온 조카는 눈물 글썽거렸다. 병원밖에는 우리 가족들 뿐이었다. 덩달아 나무에 매달린 매미가 가족의 울음소리에 맴맴 소리를 더해 한 여름 뙤약볕을 뚫고 퍼져 나갔다. 세상이 슬픔으로 잠겼다.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시신을 보기 위해 병원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놈의 코로나 확산 예방을 위해 일체의 병원 출입이 통제되었다. 병원 밖에서 사후 장례 순서를 의논했다. 코로나 상황을 고려해서 현재 모인 가족끼리 인근에서 화장을 하고, 장인을 모신 선산에 합장한다는 설득력 있는 얘기가 오갔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갖추어야 하고, 심각한 코로나 상황일지라도 알릴 것은 알려야 한다는 결정을 했다.  부산으로 모셔 가기로 했다. 거의  11시가 되어서야 부산에 도착했다.



 

(2일 차)

부산 광안리 인근 병원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다음에 가겠다고 동행을 미루던 큰 처형과 급한 약속으로 모친 방문을 하루 미룬 처제가 빈소를 지켰다. 늦게 소식을 받은 처남이 왔다. 그렇게 9남매 중 8남매 아들 딸과 9남매의 자식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40명에 가까운 장모님의 자손들이 모였다. 이렇게 많은 식구가 다 모인 것은 처음이다.


가족이 다 모이고 입관이 이루어졌다. 목관 속 하얀 백양목 위에서 장모님은 잠자듯 눈을 감고 계셨다. 자식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얼굴을 쓰다듬고 발등을 주물렀다. 엄마에 대한 애증이 남달랐던 처형이 목소리를 높여 애절한 사연을 엂조렸다. '엄마! 병원에 누워 있으나 돌아 가시나 맨 한 가지로 생각했는데, 이제 돌아가시니 그게 아니네. 엄마!', ' 엄마 내가 잘했어야 됐는데, 엄마!'... 장미와 색색이 다른 예쁜 꽃들로 장식된 목관 속에서 장모님은 눈을 감은 체 자손들의 마지막 인사와 오열을 묵묵히 듣고 계셨다. 사위 중 하나가 화투곽을 내밀며 장모님의 관속에 넣어 줄 것을 요청했다. 장모님은 사위나 딸들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화투의 고수셨다. 다음 세상에서 자손들과 만날 때까지 화투를 치시면서 기다려 달라는 의미로 넣어드리는 화투가 장모님이 이 세상에서 가져가는 유일한 품목이었다.              


산 자가 죽었으니 세상에 한 사람의 소멸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고는 하되, 방문은 정중히 사양하기로 했다. 동료와 교회 공지글에 '... 방문은 하지 마시고, 마음만은 정중히 받겠다'는 댓글을 남겼다. 친한 지인에게는 절대 오면 안되고, 오면 병원 앞에서 문전박대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방문 오시는 분들을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KF 94 마스크 수십 개를 준비하고, 조문객 간의 안전거리 확보를 위해 넓은 VIP실을 예약했다. 예상보다는 많은 분들이 장례식장을 방문하셨다. 병원이라 철저한 출입 관리를 통해 마스크를 쓰고 오신 분들을 맞이 했지만, 음식물 섭취를 위해서는 마스크를 벗는 것이 불가피했다. 다행히 기침하는 분들이 한 분도 없었다. 몇 분은 마스크를 착용한 체 가볍게 인사만 나누고 돌아가신 분이 있었고, 몇 분은 모든 분들의 조의가 마치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방문을 하신 분들이 있었다. 서울에서 방문한 회사 동료를 만나고, 군산에서 온 지인을 만난 나는 글을 작성하고 있는 이 시점까지 아무런 증상이 없다. 바이러스 질병에 아주 민감할 듯한 부산대 이공학과 교수인 처 사촌 동서가 5시간이나 상가에 있다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마스크로 무장하면 안전 예방이 되나 보다. 부디 아무 탈이 없기를 기원한다.


시간이 갈수록 상가 앞에 나열된 조화의 수가 늘어났다. 증정인을 표시하는 리본만 보이도록 겹쳐 놓았지만 배치 공간이 부족했다. 장례식 관리인이 나와서 엘리베이터 앞까지 공간을 확보해 주었지만 여전히 하얀 국화로 꾸민 조화의 배치 공간이 부족했다. 결국 손님 접객실과 망자의 영정 앞 공간까지 밀고 들어왔다. 단 하루 장례식장을 화려히 장식하고, 상가의 명성과 사회적 네트워크를 나타내는 상가의 조화 개수 제한이 필요해 보인다. 코로나 상황에서 세상이 얼어붙은 시기에 꽃가게를 살려주는 적절한 상거래가 된다는 측면이 있겠지만, 지나친 낭비로 느껴졌다. 꽃은 피었다 시든다고 하는데 하얀 국화는 단 하루 장례식 공간을 장식할 뿐, 꽃이 시들기 전에 폐기 처분해야 할 판이다. 어쩌면 꽃 가게에서 회수하여 재활용할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조화 대신 쌀 포대로 성의를 표해 주셨다면, 양로원이나 불우이웃들에게 현물을 전달하는 생산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의미 있는 상호부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조화를 사양한다는 멘트까지 전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작은 에피소드이다.          



(3일 차)

새벽 발인을 앞두고 작은 소동이 발생했다. 엄마에 대한 애증이 깊을수록, 엄마와의 추억이 많을수록 엄마를 쉽게 보낼 수 없는 법이다. 그 많은 눈물과 회한을 쏟아낸 뒤에도, 엄마와 소원했던 과거 사연과 털어내지 못한 감정 찌꺼기들의 눈물은 끝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렇게도 슬픈데, 생생하게 돌아다니는 형제들이 섭섭하게 느껴질 수 있다. 부식 간에 흘러나온 말들이 작은 비수가 되어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는 짧은 순간이었다. 지금은 모두가 슬픈 날이다. 표현만 다를 뿐 모두 자기 나름 방식으로 슬픔을 표시하고 삭이고 있는 중이다. 내 감정에 충실하고, 이웃의 감정을 존중하는 배려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8시 발인제를 마치고, 밀양 소재 화장터로 향했다. 오래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장인의 묘지를 파묘하고, 뼈를 추려 이미 화장을 완료한 상태이다. 장인 무덤이 있는 자리에 장인, 장모의 유골을 합장하고 평장 묘를 조성하기로 했다. 예전에 장인 묘지로 가기 위해서는 깊은 산 골짜기로 들어가 언덕을 건너고, 감나무밭을 지나 한참을 걸어야 묘지에 이를 수 있었다. 세월은 흘러 인근 지역이 대학교 부지로 선정이 되었고, 장인 묘지 앞까지 개발되어 건물이 들어섰다. 대학 교내에서 뒷산으로 이어지는 트래킹 길을 따라 5분여를 걸으면 장인 묘터에 이를 수 있었다. 너무도 수월하고 편해졌다. 소나무가 드리워져 잔디가 잘 자라지 않던 묘터도 깔끔히 정리되고 잔디가 새로 식재되어 있었다.

지관의 인도하에 장인 장모의 유골함이 안장되었다. 접근이 어렵고 묘지 주변이 사나워 아들들만 명절에 찾던 장인의 묘가 개선되어 훤하게 변했다. 아들과 딸들이 다시 찾아와서 편히 부모 곁에 쉬면서 얘기를 도란도란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며 기뻐했다. 무엇보다 50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장인 옆으로 장모님을 모시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례식에서 우울하게 보였던 영정 속 엄마가 아버지 옆에 누우니 빙그레 웃는 모습으로 비친다고 딸 중 하나가 말했다.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했던 교통사고가 있었던 날, 엄마 태속에 있던 9남매 막내 유복자는 50년 만에 아버지를 봤다며 좋아했다. 자식들이 짊어져 온 무거운 부담과 짐을 이제 내려놓을 수 있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고생한 엄마에 대한 감사와 보답, 고관절 훼손으로 거동이 어려워진 엄마를 모셔야 하는 사정과 현실 간 대립, 13년간 요양병원에 지불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과 이로 인한 형제간의 갈등... 모두를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어 홀가분하다고 했다.


유골이 안치되고 황토가 뿌려지고 잔디가 입혀지는 동안, 누군가의 입에서 송대관의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시던 노래를 다른 사람들도 따라 불렀다. 영정 속 장모님은 빙그레 웃고 계셨고, 빛바랜 사진 속 장인도 함께 흥겨워하시는 듯했다. '오늘 밤 엄마는 수줍어하면서 아버지를 만날 거야. 얼마나 좋은 일이야.'라고 처제 중 하나가 말했다. 아내가 10살 때 돌아가셨다는 장인의 얼굴을 나는 오늘 처음으로 똑바로 쳐다보았다.




태풍 바비의 영향으로 큰비가 내릴 것을 우려했는데,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아 무사히 모든 절차를 마쳤다. 산에서 내려와 상복을 벗고, 점심 식사를 위해 밀양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당 주인은 졸지에 찾아온 40여 명의 손님을 맞아 간밤에 좋은 꿈을 꾸었는지 확인하며, 우리를 환하게 맞이했다. 다행히 큰 식당엔 아무도 없고 우리 식구뿐이었다. 한우 등심과 갈비를 주문해 배불리 먹었다. 중대사를 마친 여유와 맛있는 한우를 배불리 먹은 후, 가족 모두가 이번 장례에 대한 소감과 가족 간의 느낌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들과 딸들은 형제자매간의 섭섭함과 소원했던 관계를 눈물로 얘기하며, 화해의 포옹을 했다. '내가 잘못했다'며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 보따리를 풀었고, 얘기를 듣는 나머지 형제와 딸들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처조카들도 동참해서 눈물로 반응했다. 처조카 하나는 '우리 엄마 소원은 이모들과 싸우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장가가서 아들 딸을 둔 사회적 중견인이 된 처조카는 '우리들은 좋은데, 이모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다들 눈물을 짓거나  먼산을 바라보았다. 장모님의 아들 딸들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을 뿐, 그로 인한 자녀와 조카들의 상처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딸들은 '우리가 잘못했다'며 자괴 했고, 아들은 엎드려 오랫동안 눈물을 지었다. 미안함, 대견함과 스스로의 결심으로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이 되었다. '우리가 남이가!', '모두 사랑합니다!', '이 행복감, 이대로 쭉!'...  건배 구호가 오고 갔다. '9남매를 당당히 키우신 시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며느리의 고백이 있었고, '밀양에 올 때마다 환대받고 즐거웠다. 고모가 그립다'라고 술회하는 고종사촌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족이 하나로 결속되어 갔다.   


식당을 나서 넓은 광장에서 둥글게 원형을 만들어 손을 맞잡고, 장모님이 즐겨 부르시던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라는 노래를 합창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포옹을 했다. 오늘 장인 장모님이 보우하사 가족이 회복되고, 서로 도우며 잘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례식은 축제의 장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 오늘 장모님 장례식은 오랫동안 못 만났던 가족과 친지가 만나고, 소원했던 관계가 회복되고, 오해와 갈등이 풀리는 축제의 순간이 되었다. 가족이 모두 한 뿌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가족이 결속되어야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근본적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자식들은 도시락을 싸서 소풍 오듯 병원에 엄마를 만나러 오고, 장모님은 잠깐 세상에 온 소풍을 끝내고 남편이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셨다. 이제부터는 자식과 손자들의 시간이다. 이 세상에 잠깐 소풍 온 우리 가족 모두 즐겁게 화합하며 살다가, '잘 살았노라'라고 인사하며 저 세상으로 엄마,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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