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아빠에 대하여
아빠는 누구인가.
아빠는 1958년 경산 자인면에서 출생했다. 위로는 누나가 두명, 아래 여동생, 남동생이 있었다. 아들로는 장남이었다. 그 시골마을에서 아빠는 영재였다고 했다. 할머니는 아빠를 낳고 매우 기뻐했다. 가난한 형편에도 아빠만 몰래 데려다가 귀한 보양식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아빠는 집안의 엄청난 기대를 받고 자랐다. 시골마을에서 장학금도 받았던 것 같다.
나 장학생 출신이야
그건 아빠의 단골 자랑이었다. 우리가 콧방귀를 뀌어도 아빠는 농담처럼 장학생 출신인 걸 자랑했다. 고모들은 공장에 다니며 아빠의 학비를 벌었고 그 학비로 아빠는 대구로 유학을 떠나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혼자 자취를 한 덕에 아빠는 독립심이 강했다. 유년 시절 돌봐줄 사람 하나 없이 혼자였기 때문에 뭐든지 스스로 헤쳐나가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아빠는 계산은 엄청 잘해서 어렸을 때 주산 자격증도 따고 했댔다. 영재로서의 면모인가. 어쨌든 그렇게 아빠는 상고를 졸업했다. 그런 아빠도 취준생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았다. 졸업 이후에 취업을 못하고 있던 아빠는 둑방에 앉아 혼자 울었다고 했다. 쭈구리고 훌쩍거리고 있었을 아빠를 떠올리면 귀여워서 살짝 웃음이 난다.
그러다 현대 그룹에 취업을 해서 울산으로 오게 되었다. 조선 업계에 종사하며 방송통신대학교도 졸업한다. 그 시절 아빠는 너무 바빠서 얼굴 보기도 어려웠다. 엄마, 오빠, 나 이렇게 세명이서 놀았다. 주말에도 일하러 나갔던 아빠는 집에서 쉴 때도 유독 날카로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직장이 된 지금은 알 것도 같다. 사는 게 피곤했으리라.
그렇게 아빠는 수십년을 조선업계에서 일했다. 일하던 직장에서 상무 직책까지 올랐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결근 한번 하지 않았다. 연차도 반납하고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독하게 성실했던 아빠는 일하러 가기 싫어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돈 주는데 왜 일을 하기 싫어하지? 난 놀기만 하면 지겹더라. 너 대신 내가 일하러 가고싶다" 이런 말들을 했다.
그래서 한평생 몸담았던 조선 업계에서 퇴직하고 나서도 새로운 일을 얻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컴퓨터 학원에 다녔고 부동산 학원에도 다녔다. 공인중개사 시험을 치르기 위해 독서실도 다니면서 공부했다. 그래도 역부족이었나보다. 결국 관두고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 보험 일이었다. 보험 일의 고됨을 지레 짐작한 우리는 만류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냥 편하게 쉬면 안돼?"
"아니. 가만히 있으면 지겹기만 하지. 일을 해야지."
1-2년 해보다가 힘들면 그만두겠지 했던 보험 일은 5년 넘게 하셨다. 심지어 작년에는 보험왕에도 올랐다. 그 선물로 집에는 커다란 안마기가 도착하기도 했다. 우리는 혀를 내둘렀다. 아빠는 시작하면 끝을 보는구나.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었다. 아빠의 장례식에서 모두들 하나같이 말했다.
참 열심히 살았다고.
참 꼼꼼했던 사람이라고.
사람들을 잘 도와주고 좋은 사람이었다고
어쩌면 나는 아빠의 삶을 아주 일부만 기억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아빠에 대한 기억의 파편을 모아보려고 한다. 아빠를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