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 대한 기억 조각 넷
아빠가 돌아가시고 많은 일들이 나에게 남겨졌다. 눈물도 짜게 식게 만드는 각종 서류들, 온갖 명의 변경, 남겨진 재산 정리…… 아빠의 그늘 아래 숨어 살던 나로선 쉬운 일이 하나 없었다. 아빠는 이런 것들을 다 하고 살았다는 거지? 나도 해내야지. 그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선 아빠의 서랍을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서랍 속엔 아빠의 일기장 여러 권이 있었다.
아빠는 매일같이 일기를 쓰고 있었다. 물론 무뚝뚝한 아빠답게 감성적인 내용은 하나 없었다. 그날의 일정, 누군가의 전화번호, 주식 투자 내용, 외식 내용 같은 것들만 간단하게 적혀있었다. 나는 방 한켠에 앉아서 그날의 기록을 썼을 아빠를 떠올렸다. 성실한 그답게 매일같이 그 자리에 앉아서 하루를 기록했을 모습 말이다. 아빠의 성실한 기록 덕분에 난 아빠의 생전 행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고 각종 일 처리에 도움을 받았다. 아빠가 이렇게도 날 도와주는구나.
일기장은 매우 아빠다웠지만 뜻밖의 모습도 담고 있었다. 어떤 날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심코 한 말이 마음에 상처를 준다. 연필로 지우개로 지운다.”
이런 생각도 했구나. 아빠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가장 큰 희생양은 엄마였다. 덩치도 크지 않은 엄마에게 등판이 왜 그렇게 넓냐느니 팔뚝 좀 보라느니…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그런 말들에 속상해했던 엄마는 오빠나 나에게 일러주곤 했다. 나는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양 아빠한테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빠는 말 좀 예쁘게 해. 행동 다 잘해놓고도 말로 깎아먹기 일쑤잖아.” 그러면 아빠는 “농담이지 뭐. 내가 원래 그렇게 말하잖아. 너네 엄마도 즐길걸?”하고 멋쩍게 웃었다. 그러곤 그런 말들에 대한 사과 없이 얼렁뚱땅 넘기곤 했다.
그랬던 아빠가 이런 기록을 했었다니. 뜻밖이었다. 아빠도 그런 점을 마음 쓰고 있었구나 싶었다.
또 어떤 날에는 명언을 적어놓기도 했다. 고사성어를 적어놓기도 했고 누가 말했는지 모를 명언들을 적어두기도 했다. 신기했다. 60살이 넘은 아빠도 인생을 더 배우고 싶어 했구나. 더 발전하고 싶었구나. 낯설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아빠의 모습이 일기장에 있었다.
남편은 그런 아빠의 일기장을 보며 감탄했다.
“아버님 진짜 매일같이 쓰셨네. 이렇게 여러 가지를 관리하고 계신 줄 알았으면 생전에 많이 배워놓을걸.”
“근데 아빠가 원래 무뚝뚝했잖아. 별 말 안 하셨는데 뭐.”
“그래도 일기장을 이렇게 읽다 보면 아버님이랑 대화하는 느낌이 들어. 평소에 무슨 생각하셨는지도 알겠고.”
“맞아. 아빠다워”
남편의 말대로 일기장은 아빠의 많은 걸 담고 있었다. 간결한 단어들의 나열이었지만 그 단어들은 아빠의 하루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아침 일찍 밖에 나가 일하다가 간간히 주식도 하고 우리와 외식도 하고 각종 일 처리도 했던 아빠의 하루말이다. 매일의 일기 속에 그가 켜켜이 묻어났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살고 싶었던 아빠가 일기장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