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맞고 걷고 뭉클하다
퓌센에서 로맨틱 가도를 따라 올라갔다. 비스를
지나 로텐베르크로 향하던 중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했다.
자동차를 여행하면서 좋은 점은 목적지에 조금
늦더라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면 티켓을 끊고 그 시간을 맞추느라 매우 허겁지겁했을지도 모른다.
나처럼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 신기하여 들여다 보길 좋아해서 자칫 예정된
시간들을 놓치기쉽다.
운전하는 남편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자동차로
다니니 마음이 많이 느긋해졌다.
비스와 에탈 초원을 꽤 오래 걸었다. 그래서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하니 슬슬 해가 지고있었다.
호텔에 차를 주차하고 도시를 걸어보는데
어느 마트의 유리창 너머로 예쁜 진열대가 보였다. 식빵들이었는데 마트 식빵임에도 불구하고 종류가 정말 많았다. 건강한 재료와
특이한 재료로 만든 식빵들을 보면서 신기했는데 우리가 쌀이 주된 식량이듯
그들의 주된 식량이 빵이니 이렇게 다양한
식빵이 존재하는구나 싶었다.
한가지씩 모두 사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었다.
요거트 종류가 굉장히 많은데 투명한 유리문이 있어서 손모양의 스티커에 손을 대면 자동으로
유리문이 샤라락 열리면서 맛있는 요거트 제품들이 보인다.
그 유리문을 직원들이 어찌나 열심히 닦는지
많은 손님들이 다녀갔을텐데 지문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사람 다녀갈때마다 옆에서 수건을 들고 있던 직원이 와서 닦았다. 그모습만으로도
온국민의 성실함을 대변하는듯 해서 놀라웠다.
이날은 이른 점심을 먹었던 날이어서인지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몹시 배가 고팠다.
호텔 매니저에게 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가장 맛있는 집이고 미슐렝 인정받은 집이라고
하여 15분 가량 걸어서 식당에 도착했다.
테이블 의자를 손님들이 빼내기 쉽도록 약간
비스듬히 빼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학센을 먹어보기로 했다.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거쳐 독일로 오면서 슈니첼과
학센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도시마다
다른 슈니첼과 학센의 맛이 신기했는데
슈니첼은 그런대로 입맛에 맞았지만 학센은
성공을 하지 못했었다. 호텔에서 추천한 이곳은
뭔가 좀 다를까 기대하며 갔다.
학센, 송아지 고기, 돼지 앞다리 찜을 주문했다.
그런데......
역시나 입맛에 맞지 않았다. 학센은 어찌나
껍질이 딱딱한지 나이프로 해결되지 않을 정도였다. 팔이 아프도록 나이프로 두드려 가며
간신히 먹을 수 있었다. 송아지 고기는 육질은
부드럽지만 소스가 굉장히 시큼하고 짜서
거북했다. 아주 힘들게 식사하고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팁까지 얹어 지불하고 나니 허무했다. (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고
분명히 입에 맞는 사람도 있을거라 생각한다)
새벽에 일찍 눈이 떠졌다. 밤사이 비가 내렸었나보다. 전날 저녁을 별로 맛있게 먹지를 못해서인지 배가 고팠다. 남편과 둘이 거리로
나갔다. 새벽 7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는데
동네 빵집엔 벌써 불이 훤하게 밝혀져 있었다.
한두명씩 아침식사를 위해 빵을 사러 들어왔다.
우리도 두어개의 샌드위치를 골랐다.
양배추가 가득 들어간 샌드위치는 아주 개운하고 맛있었다. 가격도 한 개 4천원정도였다. 등교하는 아이들 데리고 온
엄마들도 있었다. 동네에서 맛있는 빵집인 것이
느껴졌다.
숙소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고
거리로 나왔다. 관광객이 그리 많은 도시는
아닌듯 했다. 많이 한산했고 구석구석 걸어다니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걷다보니 고성처럼 보이는 아우크스부르크 대성당에 도착했다.
성경속 인물을 자세히 묘사한 35개의 청동문과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성당문이 청동인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무겁고 정교한 청동대문을 열고 들어갈때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주일이라서 미사중이어서 중앙의 제단을
사진대신 영상으로 남겼다.
미사중에 할아버지 한분이 오르간을 연주하고
계셨다. 아주 오랜세월 봉사하고 계신다고 했다.
내부는 화려하지 않았다. 단정하고 간결했다.
에탈수도원의 반짝이던 내부와 사뭇 대조적이어서 의아했다.
유럽의 대문이나 성당의 문에 분필로 숫자와
이상한 부호를 길게 써놓은 걸 많이 보았다.
인터넷검색을 해보아도 도통 알수가 없었는데
Chat GPT 가 알려주었다.
유럽권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써놓은 이 문구들은 대개 C+M+B 와 같은 형태인데
C M B 는 동방박세 3명( 카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자르) 의 이름을 의미하거나 라틴어 문구인
Christus Mansionem Benedicat ( 그리스도께서 이 집에 축복하기를) 의 약자로
해석한다고 한다. 보통 연도를 같이 써서
2020년이면 20*C+M+B*20 으로 표기한다.
분필로 대부분 썼고 지운 흔적도 있고
재미있다.
길거리가 매우 한산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비오는 일요일이서일까. 관광객은 잘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우리가 그곳 주민인듯 착각이
들었다. 비에 젖은 도시를 트램이 가로지르고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이지만 무겁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조금 더 걷다보니 모짜르트 하우스가 있다.
핑크색 건물이었는데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모짜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의 생가이다.
하지만 자식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의
자료들이 더 많은듯 했다.
레오폴트는 모짜르트가 어릴때 사교육을 무려
17개나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일찌감치 음악영재교육을 시켰는데 주사위에 악보를
그려 던져서 짝을 맞추는 놀이까지 시켰다고 하니 모짜르트의 음악적 재능은 천재적인 것과
아버지의 엄청난 뒷받침이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그가 입던 옷, 연주했던 바이올린도 있었는데
그가 연주한 피아노는 다른 연주회에 대여해 주어 그날은 없다고 했다.
고등학교때 명보극장에 가서 아마데우스 영화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고 그 이후 나의 클래식 음악 사랑은 더 깊어졌었다.
아버지의 생가지만 아들의 악보와 편지, 그리고
아들이 입었던 옷들로 채워져 있었다.
부모의 마음이 느껴져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우산이 없을때 폭우를 만난다. 잠시 비를 피하기위해 카페로 들어가 따뜻한 커피와 케잌을 주문했다. 그런데 들어가는 절차가 몹시
복잡하다. 문열고 들어가면 케잌과 초콜렛이
가득한 매장이 나오고 거기서 계산을 하면
영수증을 준다. 영수증을 가지고 내부의 유리창 앞으로 가서 기다리면 직원이 문열고 나와서
자신들이 정해준 자리로 안내한다. 원하는
아무자리에나 앉으면 혼난다. 이유를 모르는
엄격함에 좀 당황스러웠지만 모두들 순종하고
조용히 앉아서 소근소근 이야기 하며 커피를
즐기고 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카페는 주로 부유층 인사들이 미팅을 즐기는 곳이라고 한다.
어쩐지 가격이 굉장했었다. 모르고 들어가서
가격에 황당했었다.
시청사 앞에는 남북을 잇는 막시밀리안 거리이다. 이곳은 가장 번화한 곳인데 남쪽 끝까지 걸어가면 종교화의의 상징인 성 울리히
& 아프라 교회가 있다.
신교회와 구교회가 공존하는 신기한 교회이다.
1517년 마틴 루터는 < 95개조문>을 통해
당시에 부패한 로마교황청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새로운 교리를 주장했다.
이러한 루터의 복음이 당시 교황에게 억눌려있던 시민들에게 큰 지지를 받게 되자
로마교황청은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탄압했다. 이에 루터는 종교개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두 종파가 갈등이 커지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를 통해 루터의 복음주의도 인정받게 된다. 이에 상징적으로 가톨릭 성당인 아프라 교회 앞에 성 울리히 교회를 붙여서 지었다. 일요일마다 예배와 미사를 함께 드리고 있다. 출입구도 2개이다.
드디어 푸거라이에 도착했다. 야코프 2세가
만든 세계 최초의 사회복지주택이다.
아우크스부르크는 16세기 푸거가문과 벨저가문
과 같은 상업, 금융귀족의 중심지로 발전한
도시이다.
푸거 가문의 전성기 시대를 이끈 야콥 푸거는
그당시 유럽 최고의 부자였다. 그당시에 복지의
개념이 없었는데 푸거는 복지를 일찌감치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돈으로 빈민구제시설을
67채 지어 이 주거용 건물을 가난한 이웃이
살도록 해주었다. 안에는 교회도 있고 공동 우물도 있다. 어떤 자료에서는 ' 도시 속 도시'
라고도 표현할 정도로 불편함없이 만들어 놓았다. 이곳은 현재도 이용되고 있는데
1년에 0.88 유로만 내면 되는데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단 한가지만 요구한다고 한다. 푸거재단을 위해 기도하고
매일 주기도문을 외울것.
이렇게 저렴한 임대료를 지불하니 원룸정도일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모든 집들이 마당이 딸려 있고 방과 주방이
엄연히 분리가 되어 있어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었고 지금까지도 푸거 재단에서
운영을 하고 있다. 아주 깔끔하고 아름답게
지켜오고 있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잔디마당도 나와서 나는 이곳이 공원인줄 알았다.
노랗게 지어진 푸거라이는 그곳에 사는 주민들도 아주 평화로워 보였고 집을 둘러 보는
우리에게도 아주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푸거재단이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했다.
매우 경이로운 풍경이었고 우리도 배워야할 것이 많다고 생각되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어울려 살아가는
그 도시가 참 아름다웠다.
푸거라이가 있는 거리는 소소한 공방들도 많았다. 인형병원도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때 가지고 놀던 바로 그 인형을 고쳐주는
병원이었다. 고장나서 버렸는데 사람처럼
고쳐주는 병원이 있다니 .
어느덧 해가 지고 아우쿠스부르크의 밤거리는
너무 적막해서 쓸쓸하기까지 했다.
큰 기대없이 갔던 도시였다. 그런데 푸거라이를
보며 많이 뭉클했었다. 나는 부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늘 있다.
없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약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살고 있다. 서로 이질감을
갖고 말이다.
내가 본 아우크스부르크는 동질감까지는 내가
알수없지만 최소한 이질감은 없이 살아가는듯
했다. 그건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출발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푸거재단의 활동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돕는차원이 아니고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법을 시민들에게 오랜세월 가르쳐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발견한 빨간 플랭카드에 새겨진
아우프 비더젠을 보며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비맞고 걷고 뭉클했던 아우쿠스부르크에
꼭 다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