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구체기도 하고 구체적이기도 해요.
1. 다 사라지고 밤뿐이네. 안녕. 이 대사는 페르소나, 밤을 걷다에서 등장한 마지막 내레이션이다. 어쩌면 죽고 난 다음의 일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 사라지고 밤이 온다는 건 그 이전의 낮과 오후 그리고 이후의 새벽까지 전부 사라지고 밤만 남는다는 소리 같으니까. 밤만 남은 곳에서 사람은 죽어도 자꾸 죽게 되는 걸까. 가끔은 꿈에서 만나 기억을 자꾸 발화하지만, 끝내 사라지면서 고이게 되는 걸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때까지.
2. 잠이 안 올 때 쓰는 글은 잠이 깨고 나서 보면 형편이 없겠지만.
3. 능력 모두를 다해 글을 쓰더라도 읽어주는 사람 하나 없을 수 있다. 그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누군가는 또 해야 하는 일이라 하지 않는다. 이 일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 목적도 의미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자꾸 행위에 발 붙여보려고 한다. 내가 아는 건 내가 아는 만큼의 일이고, 이제 내가 모르는 일이 점차 많아지는데.
4. 조급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 여기서도. 안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이 자꾸 헷갈리는 걸 보니 계속 문법을 맞춤법을 띄어쓰기를 갈고닦아야겠다 생각한다.
5. 신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마세요. 이런 따뜻한 말을 들으면 반발하고 싶어 집니다. 뒤엉키고 싶기도 합니다.
6. 각자 신을 너무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리 신이 많은 세상이 엉망인지도. 각자 믿는 신이 너무 다르니까.
7. 혼자 올라가는 지하철 계단을 좋아한다. 여기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바깥에는 누군가 있다는 안도감.
8. 문재인이 퇴진해서 도대체 나아지는 게 뭡니까. 나빠지지는 않겠죠. 어떻게 그걸 확신하죠?
9. 심심한데요. 같이 심심하죠. 그럼 덜 심심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어제라서 자꾸 늦춰졌어요. 사라지기만 했어요. 존재하는 줄 모르고 그렇게 있었어요.
10. 구찌 쇼핑백을 들고 있는 중년여성은 감색 첼시 부츠를 신고 카멜색 코트를 입고 있다. 브랜드가 먼저 보인다. 브랜드가 사람을 압도한다.
11. 달은 구체기도 하고 구체적이기도 해요. 입체적이라서 다행입니다. 적어도 당신이 있는 동안 사라지지 않겠죠. 당신이 다시 당신을 만들 동안에도.
12. 어느 날은 꾸준하게 퇴화하는 듯 느껴졌다. 나에게는 속도가 있고, 속도는 죽고, 속도가 힘겨웠다. 파란. 다시 파란.
13. 늦지도 늙지도 않는 계절이 있고 거기에 섬 하나 있어서 늦지도 늙지도 않는 게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다.
14. 여기는 늦고 늦는 동안에도 옛 생각을 했다. 옛 생각을 하면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 듯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환대였다. 환한 대접. 환희에 찬 대접. 무심한 반전.
15. 이제 너 없이도 너가 없음을 알고 너가 없어서 충분한 시간이 시간보다 더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참 추웠다. 그만. 꼭 그렇게 추울 필요가 냉정할 필요가 있었나.
ⓒ 김학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