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렇게 무난하고도 유난스러운 이유는 다 열심히 살아서야
16. 비상구는 한 곳이었다. 멀어질 수도 있었고, 멎을 수도 있었는데 둘 다 불쌍해지는 쪽이었다. 달라지기도 했다. 서로 다른 말을 했으니까.
17. 우연이 몇 번 있었고 우연 다음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태어났고 태어난 다음에는 살아야 했습니다. 무엇이 더 힘들고 더 바쁜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18. 듣기 좋았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들리고 있는 이야기는 영 듣기 어려운 이야기처럼 느껴졌으니까. 눈이 오면 언제 그칠지 걱정하는 사람과 쌓인 눈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과 눈으로 어떻게 놀지 궁리하는 사람이 나뉘었다. 각자 다른 눈사람이지만 모두 눈으로 만들어졌듯.
19. 어느 순간에 기어이 만들어지는 말이 있었다. 기꺼이 뻗어보는 손도 물론 있었다. 만지면 뜨거워서 잠깐 물러났다가 다시 옆에 있었다.
20. 그럼, 또 어떻게든 해야지. 또 어떻게든 해야지. 자꾸 그렇게든 해야지. 무조건 해야지. 무성하게 해야지.
21. 미납회차에 돈을 넣어야 한다. 십만 원씩 넣는다. 십만 원씩 넣는다. 아무런 말도 못 한다
22. 우리가 이렇게 무난하고도 유난스러운 이유는 다 열심히 살아서야. 그러니까 힘내자 아자아자 파이팅!
23. 청소년 요금으로 찍혔어요. 다시 오셔서 찍으세요.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카드가 청소년 카드예요. 아이, 저 여편네가. 됐습니다. 됐어요. 다 해결했습니다.
24. 뜯어보면 온통 빛나는 순간들인데 매사 뜯어볼 수 없으므로 그 빛은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끔 빛난다. 잠겨 있기 때문이다. 잠겨 있다가 금방 번지기 때문이다.
25. 했던 일은 해서 안 하고 싶고 안 했던 일은 안 해서 안 하고 싶으므로 너무 저당 잡힐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그냥 해라. 그래라.
26. 우리 그때 어떻게 웃었지. 나는 늙고 손을 가지게 되었다. 하늘이 병들어 자주 콜록거렸다. 약을 사다 주고 싶어도 도통 듣는 약이 없었다. 우리 그때 어떻게 웃었든 지금도 웃어야 했다.
27. 시간의 졸 언어의 밧줄 삶의 반등 의자의 침묵 가위의 빛 버스의 날 나무의 뜻 오후의 기차 사람의 만남 자동차의 벽 난간의 이마트 사월의 신발 과학의 이유 존재의 아이스크림 계단의 무릎 나무와 무성 박테리아와 구원
28.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어서 산 사람들이 더 입을 벌렸다. 그 입에서 나온 말들은 무섭거나 무겁거나 진지했다. 난 죽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애도까지가 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어떤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 편하자고, 이런 일을, 다른 사람을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려 죽이는 일을 반복한다.
29. 날씨를 지나가고 있다. 지나가고 나면 전부 끝날 일을 반복하고 있다. 영원과 쉼을 동시에 한다.
30. 삭제할 수 있는 문장을 모조리 삭제하고 나니 작은 안식이 남았다. 우린 왜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할까.
ⓒ 김학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