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과 요리
재료
쌀이 불려지는 동안 전날 준비해 놓은 당근채를 볶기 시작했다. 옆에서는 물을 끓여 시금치 삶을 준비를 했다. 전기밥솥이 없고, 가스레인지의 화구가 2개라는 사실은 이럴 때, 작업순서에 더 신중을 기울이게 한다. 시금치를 삶고 나서 솥을 올려 밥을 짓는다. 굵은소금을 4-5알 넣었다.
당근은 마른 팬에 볶기 시작하다가 수분이 줄어들고 뽀얗게 익어가면 올리브오일을 조금 넣고 윤나게 볶았다. 맑은 색과 신선한 기운이 살아있으면서 익은 야채의 담백한 단 맛이 느껴지도록, 당근은 잘 볶아졌다.
당근을 담고 달걀말이를 만든다. 팬의 온도를 조금 낮추고 올리브오일을 얇게 코팅한다. 소금 간 한 달걀물을 넓은 프라이팬에 펼쳐 붓는다. 조금 경사진 팬의 외각부터 얇은 껍질로 먼저 구워지는 부분을 포착해서 말아내기를 시작한다. 중간까지는 순조롭다, 점차 말아가면 된다. 원형의 팬은 끝에서 말아지기 시작한 달걀을 가운데 부분에서 지름만큼 키웠기 때문에, 정점을 지나면 줄어들기 시작하는 팬의 턱에 걸치며 말아지게 만든다. 마지막에 가서는 조심스레 뒤집개로 바닥에서 떼어내고, 중앙으로 옮겨 한번을 끝으로 접는다. 겉이 노르스름하게 굽는다. 다 익으면 접시로 옮겨 식힌다.
잘라놓은 김밥용 햄을 길게 줄지어 굽는다. 김밥용 햄은 친절하게 김 한 장의 폭 크기에 맞춰져 있고, 김밥 한 줄에 넣을 만큼의 한 줄, 눈금표시가 제품마다 다른 방식으로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금만 집중해서 그 열을 따라 칼 끝을 움직이면 된다. 김밥용 우엉과 단무지, 게맛살이 김의 모듈을 공유하고 있다. 이쯤이면 김밥용 치즈, 어묵, 오이, 계란까지.. 아니 내가 지금 모르는 대량생산의 세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사의 음식 프린터기에 걸맞은 발전이다. 조린 우엉과 단무지는 기성품을 이용한다. 비교적 효율적인 반반 세트로 꾸린 포장의 끝을 가위로 자르고, 싱크대에서 위쪽부터 꾹꾹 눌러가며 절인 물을 빼고 꺼내서 쓴다.
그럼 그 기준이 된, 김의 크기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재래식 김 만드는 영상을 찾아보았는데, 김 발에 사각 틀을 올리고, 그 안에 풀어져 있는 김을 한 그릇 떠서 담고, 잘 핀 후 틀을 제거하면 한 장의 형태가 남는다. 그 걸 널어 말린다. j는 말했다. ‘종이 만드는 것과 같지.’ 김 발이라는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을 만들기도 하고 그 걸로 김밥을 만들기도 한다. 김을 만들 때는 대의 사이사이로 통풍이 되니 물이 마르고, 매끈한 표면의 둥근 대에서 김이 잘 떨어지니 마른 상태가 되면 떼어내기도 편하다. 판판하게 바싹 마른 김을 발에서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발을 휘어가며 떼어낸다. 김밥을 말 때는 그 발의 자국이 남은 거친 면을 김 발 위로 올리고 그 요철들의 마찰력을 이용해서 밥을 부착한다. 김(음식) - 나무위키 (namu.wiki)
밥이 다 되었다.
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휘이 저어 놓고, 소금 간을 더 해주었다. 그리고 올리브오일을 작은 티스푼, 아주 약간 넣고 밥을 잘 섞었다. 여기에 넣는 오일의 용도는 밥이 식는 동안 수분이 많이 날아가지 않도록 잡아주고 밥을 김 위에 펼칠 때 수월하게 해 준다. 저번까지는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넣어주었지만, 올리브오일을 넣어 볶은 재료들과 들기름과의 만남이 조금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 바꾼 것이다. 밥을 김의 안쪽부터 2/3까지 펴 올린다.
우리는 요리할 때, 올리브오일을 주로 쓴다. 튀김하고 두부 구울 때는 일반 식용유를 쓰고, 삼겹살을 먹을 때 소금기름은 들기름이나 참기름을 쓰는데, 시골에서 주신 기름이 있을 때만 쓰고 없을 때는 올리브오일로 대체한다. 신선하고 활용도가 높은 것이 장점이다. 단순하게 요리할 때 재료의 맛을 잘 살려준다. 어제 먹고 남은 기름기 많은 닭튀김이나 감자튀김을 프라이팬이 구울 때, 올리브 오일을 살짝 넣어주면 신선한 기름의 힘으로 오랜 기름을 살린다.
작업
김밥 도시락 싸기 외에 다른 일을 하나 해야 했는데, 지금이다. 재료들 준비가 끝나고 밥을 식히고 있는, 김밥을 말기 전. r의 양갈래 머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전날 밤에 예행연습도 했다. ‘지금이야.’ 한 번의 수정을 거처 완성했다. 갑자기 실 빗을 쥔 손이 집중된 정교한 작업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일은 비는 시간을 틈타하는 것이지만, 오늘의 성패를 다투는 것이다. 깔끔하게 중요한 일 하나가 완료되었다. 이 틈에 샐러드를 만들었다.
샐러드 칸에는 우리의 생활 재료들을 담기로 했다.
전날 밭에서 따 놓은 상추와 바질, 구운 호박과 방울토마토 그리고 사과로 채웠다. 아침의 사과, 여름의 토마토, 담백하게 구운 호박이다. 올해까지 일곱 번째 구청에서 운영하는 나눔 텃밭을 하고 있다. 세 번은 추첨에서 떨어졌다. 상추의 쫄깃함을 맛보고, 당근 잎 튀김을 해보고, 바질을 산더미 같이 얻어서 온갖 바질을 활용하는 실험요리를 했다.
김 위에 밥을 골고루 펼친다,
준비된 재료들을 올린다.
김밥의 가운데 재료들을 배치시키려면 재료들을 어디에 배치해야 하는가. 일단 재료들의 표면적보다 밥이 넓게 펼쳐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속 재료들을 잘 모으고 눌러서 밀착시킨다. 안쪽부터 채워 둥글게 말아간다.
나는 침착한 척하며 김밥을 말기 시작한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5분 남짓이라는 게 무척 긴장되게 만들었지만 요령껏 침착했다. 이게 이렇게 그날의 김밥을 복기하는 이유다. 시간이 왜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간 것일까. 전날의 준비까지 설계를 했고, 모든 것이 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스쿨버스를 타려면 5분 후에 나가야 한다. r에게 음료수와 얼린 물을 먼저 챙겨 넣으라고 얘기했다.
김 발은 둥글게 마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꾹꾹 눌러 형태를 잡을 때, 손의 힘과 손가락의 꾸욱 눌려지는 힘을 긴 대가 골고루 분산시켜 주어서 고르게 퍼지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인 것 같다. 그렇게 꾹꾹 눌러서 재료들이 매끈하며 탄탄하게 형태를 갖추도록 한다. 김 발은 말리기도 하고, 말리기도 하는 못 말리게 좋은 도구이다. 그렇지만 이 긴장감.
가장 중요한 공정이 남았다. 종종 가는 김밥집 사장님은 옆에서 보자면 얇고 긴 칼을 최대한 수평으로 잡고 얕은 호를 그리며 시잉시잉 김밥을 베어내었다. 칼과 도마의 수평과 수직이 중요해 보였다. 식탁에 재료들을 펼쳐놓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김밥을 썰려고 보니 손에 잡은 작은 칼과 낮은 작업 높이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지만 불편함을 고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칼을 왼손으로 쓴다. 이 부분이 j와 같이 부엌에 있을 때 동선이 꼬이는 이유가 된다. 아주 가끔, 정신이 없는 경우 지하철 개찰구에서 왼손에 카드를 들고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왼쪽에 카드를 데어 통과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나의 칼질이 불안하다고 생각한 j는 작은 칼을 사기에 이르렀다. 우리 집 칼은 보통보다 작고 칼 날도 얇은 편이다.
식탁의 높이 73cm, 보통 도마를 올려놓고 쓰는 테이블 높이 90cm, 이 높이의 차이가 김밥 완성도를 떨어트리고 있다. 식탁에 늘어놓고 준비하고 힘주어 누르는, 마는 것까지는 무리가 없었는데, 써는 것은 다른 문제다. 칼질을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무릎을 살짝 굽혀야 했다, 쓱으윽. 풀어짐 없이 형태를 유지하며 알록달록한 단면이 잘 만들어졌다.
오랜만에 쫄깃한 데드라인을 맞췄다.
r에게 썰어놓은 김밥을 몇 개 쥐어주고 6시 35분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같이 집을 나섰다.
돌아와서 남은 김밥을 말고,
도시락통에 담고,
하나씩 정리해서 넣고,
식탁을 비웠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뜬금없이 요리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할 때, j는 ‘그런 글을 쓰려면 일단 100편은 써야 스스로 그런 글을 씁니다. 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꾸준하게 해야겠지.’라고 말했었다. 국문과 동아리 선배는 노트 구석에 ‘시 100편 쓰면 시인이다.’라는 글을 적어놓았었다. 그는 시인이 되었다. 100편이라는 숫자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나의 100번째 글에 100번을 남겨 두었다. 100개의 글이 모이면 책을 만들어보자 어렴풋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거의 다다랐을 때는 (아직 다 채워지지 않았었지만),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목차를 다듬고 몇 편의 글을 추가해서 책을 지었다. 그때,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100이라는 숫자를 놓칠 수 없어서 100을 채울 목록을 만들고 빨리 써넣어야지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 건 안될 일이었다, 채울 수 없었다. 그렇게 100의 언저리에서,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건 매일 가꾸고, 단단하게 쌓은 것들에 대한 애정이 글 자체에 대한 부끄러움보다 컸기 때문이다.
시작은,
다시 읽고, 목록을 만들고, 분류하고, 배치하고, 흐트러진 사진들을 배열하고, 검토하고, 다시 식사 메뉴를 만들었다. 몇 번 수정을 하며 읽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흥미로웠다, 조금은 낯설었다. 우리가 만들어낸 세계를 엿본 다는 것은. 손에 잡히는 책의 크기, 종이의 질감과 무게, 색감, 글자들의 간격, 페이지의 여백과 시선들. 만들어냄, 지음. 편집 과정에 대한 경험 자체도 새로움이 되었다.
그래서 식탁 위의 식사, 요리는, 특히 오늘의 김밥은 일종의 편집 같다는 생각을 한다. 주제를 정하고 재료들을 찾고, 다루고 그러면서 날 것을 잘 살리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순서를 생각하고 조리하고, 배열하고, 맛본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각각의 색을 가지고 튀어 오르게 만든다. ‘지은이’라는 말의 폭넓음을 생각해 본다. 글을 짓는, 건물을 짓는, 책을 짓는 지은이 밥을 짓다.
편집 編輯 (엮을편,땋을편/모을집) 「명사」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 신문, 잡지, 책 따위를 만드는 일. 또는 영화 필름이나 녹음테이프, 문서 따위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일.
국립국어원표준어대사전
일정한 방침이라는 것은 분명히 드러난다. 드러나 보인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불륀다, 생활방식, 태도, 생각.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우리는 굵은소금 30kg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소금을 쓰지 않고 가끔 열무물김치를 만들거나, 매실절임을 위해 소금 쓸 때를 포함해서 요리와 살림에 굵은소금을 썼는데, 이제 소금주머니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10년 주기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소금주머니 같은 것이 되었다.
매일이 모아 놓은 우리의 일상은 식탁의 요리와 소소한 얘기들에서 시작해서 부엌이라는 집과 가족, 동네라는 생활공간, 팡팡 튀며 삶을 넓혀주는 여행으로 확장했고, 우리에게 익숙한, 꾀 근사한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의 10년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작은 집과 텃밭, 한 자루의 굵은소금, 한 권의 요리노트.
그 사이에 나는 김밥을 실패 없이 말게 되었다.
김밥 도시락을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