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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삼거리 Sep 03. 2020

부엌

공간에 대하여


  어릴 적에 마루가 있는 개량 한옥에 살았다. 옥외 부엌에 아궁이가 있었고, 마루 옆 마련한 간이부엌에 가스레인지가 있었다. 가끔 마당에 꺼내 사용하던 석유풍로도 있었다. 엄마는 큰 솥에 기름을 담고 도넛을 만들었다. 그 옆에서 허옇고 얇은 밀가루 반죽이 기름솥에 들어가 짙게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구경했다. 달달한 기억이다.

 30년 가까이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엄마의 요즘 부엌은 가전기구로 가득하다. 김칫독은 김치냉장고가 되어 집으로 들어왔다. 가스레인지는 인덕션으로 바뀌었고, 전기밥솥, 착즙기, 야채 건조기, 믹서, 전기 불판 등이 있었다. 아직 에어프라이어는 보이지 않는다. 부엌에 요리 도구를 정리하는 선반이 들어왔고, 그래도 공간이 더 필요했기에 비워져 있는 방으로 부엌이 확장 중이다.

 5명 기준이던 식탁이 2명으로 줄었지만, 그곳에서 제사음식, 명절 음식을 준비하고 김장을 하는 일은 여전하다.


  나의 부엌은 매우 단출하다. 우선 집이 작다. 작은 집 - 작은 부엌 - 작은 냉장고. 세 식구가 기준이어서 그릇들도 적다. 특별한 의식도 없다. 전자레인지는 한두 번 쓸까 말까 해서 수납장 안에 들어가 있다. 지금은 전기밥솥도 없다. 믹서기가 하나 있고, 간단히 작동되는 착즙기가 있다. 문제 되는 것이 없다. 불편함은 요령껏 해결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가능한 범위에 있다.


 한식 위주의 식사보다는 메뉴의 폭을 넓혀 가볍게 준비해서 먹는 것들이 있다. 복잡한 요리들은 섣불리 도전하지 않고 맛있는 식당에서 사 먹는 것을 선호한다. 도전했으나, 사 먹는 것으로 결론 낸 것이 몇 있다. 닭볶음탕, 찜닭, 쌀국수 등


 보통의 날, 식사 준비시간은 30분이다. 재료는 필요한 것을 그날 마련한다. 한 끼 먹을 만큼만 준비한다. 재료 준비를 하고 밥이 되는 시간 동안 모든 준비를 마친다.

 매일 요리하지 않는 이상 냉장고에 보관하기보다는 그날 집 앞 시장이나 마트에서 장 본 재료를 사용한다. 감자, 당근 등 야채를 한 개씩도 살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식재료를 보관하지 않는다. 상온에서 보관 가능한 양파나, 다른 기본 야채들 ( 파, 마늘 등 ), 달걀 정도만  살 수 있는 단위만큼 사놓고 쓴다. 텃밭에서 키운 야채는 시간을 내어 식사 전에 밭에서 수확한다.


 시간을 오래 들이는 요리는 한정되어 있다. 조리법은 간단하다. 다 넣고 끓인다, 닭백숙 등


 텃밭을 하고 있어서 야채들을 다듬는 날이면 실내라는 제약과 좁은 공간에서 펼쳐놓고 한 번에 하기 어려운 일 때문에 불만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리저리 궁리해서 어지럽지 않게 작동하는 움직임 순서를 짠다. 간단하게라도 열무로 김치를 담는 날이면 보관 가능한 공간을 만드느라 냉장고 정리가 필수가 된다. 불필요한 것은 정리한다. 청소와 관리를 생각하며 우선 ‘있는 공간을 잘 정돈하자.’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요즘 고민이 되는 것은, 쓰레기들이다. 사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지만, 버리는 것은 지정된 요일이 있고, 형식이 있다. 우리는 생수를 한 병씩 사 먹는데, 투명 페트병 분리수거는 1주일에 한번 요일이 지정되어서 쌓이는 병들을 위한 별도 공간이 추가되었다. 음식물, 일반, 재활용, 종이, 투명 페트병들이 각자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 버려지는 것들은 집 앞 지정된 장소로 이동해 집집마다 둥그스름하게 모여 공간을 차지하다가 차를 타고 떠난다.

 저번 주에 잊고 내놓지 않은 페트병들이 평소 두배의 공간을 차지하고 집에 오늘 저녁까지 있을 것이다. 투명 페트병 항목이 늘었지만 그것들은 확실한 재활용을 보장받는 것 같아서 마음의 짐은 약간 줄어든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제일 좋았던 것이 부엌이었다. 현관문 열자마자 보이는 곳이지만 싱크 대위 창문에서 햇빛이 잔뜩 들어오고 있었고 앞 건물 붉은 벽돌과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보였다. 기분 좋은, 요리하는 부엌의 모습이었다.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이고 있다가, 삐걱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면 담벼락 위를 지나가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기도 하는 곳이다.


  부엌을 설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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