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에스프레소
"제가 (여러분의) 취향을 잘 몰라서..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처음 가 본 바닷가 카페 사장님이 물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카페에 가자는 친구와 시내에서 만났다. 평일 낮, 다른 손님이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런 곳이 처음이어서 쭈뼛거렸지만 친구는 여유롭게 메뉴를 보고 먹고 싶은 것을 골랐다. 다행히 메뉴판이 설명이 잘되어있어서 찬찬히 보고 ‘진하고 고소한’ 정도의 설명에 다른 메뉴보다 저렴했던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작은 잔에 담긴 한 모금의 커피였다. 앞에 놓인 친구의 것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에 당황스러우면서도 깔깔 거리며 ‘뭘 시킨 거야!’라는 친구의 말에 웃음을 참으며 한 모금을 마셨다. 찐하고 쓴 정신이 번쩍 나는 맛이었다.
그 카페는 햇빛 잘 드는 천창도 있고 포켓볼, 다트 같은 것들이 한편에 마련되어 있어서 이것저것 해보며 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자리에 앉아서 한 모금 더 마시며 나쁘지 만은 않군 하는 생각을 할 때, 사장님은 어린 손님들이 신경 쓰였는지 자리로 와서 "더 필요한 거 있어요?"라고 물었고 내 빈 잔을 보곤 한잔 더 리필해주겠다고 했다.
“설탕 넣어서 먹었나요?”
“아니요, 그냥 마셨는데요.”
“설탕 넣어서 먹어봐요, 괜찮아요.”
설탕! 그렇구만. 괜찮은 맛이었다.
가끔 지나치며 본 그 카페는 지금도 영업 중이다.
대학교 때 친구들은 스타벅스에 신제품이 나왔다며 가보자고 했다. 스타벅스가 뭔지 모르지만 같이 가보기로 했다. 새로 나온 메뉴는 크림이 잔뜩 올려진 한잔의 케이크 같은 프라푸치노였다. 나에게 그때의 카페는 '신상'이라고 하는 것을 구경 가는 '핫'한 곳이었다.
카페가 조금 더 친하고 편하게 다가온 것은 여행을 다니면서부터다. 포항 호미곶에 해돋이를 보러 간 친구와 한참을 밖에 머물며 추위에 떨다가 근처에 보이는, 유일하게 문을 연 것 같았던 다방에 들어가 차를 한잔 마시기로 했다. 다방은 더 낯설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름도 기억난다. '유채 다방' 창밖으로 유채꽃들이 피었고 유채꽃같이 노란 간판과 장식이 되어있던 햇빛 잘 드는 곳이었다. 우리는 쌍화차와 율무차 정도를 시키고는 그 진한 맛과 따뜻함에 반하고, 폭신한 소파 위에서 몸이 녹는 나른함에 취해 잠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는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저기 배달 주문 들어와 분주한 가게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 고단해 보이는 여행객들을 위한 배려였는지 너무나 잘 쉬고 다시 길을 나섰다. 포항을 떠나 부산, 보성, 광주, 대구로 다니는 동안 우리는 카페나 찻집이 보이면 들러 쉬곤 했다.
일을 시작하고 혼자 생활을 하면서 도심의 늦은 밤과 주말에 한적한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책을 보고 이것저것 생각을 정리하며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집과 일터 경계에 있는 것이 카페였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실무의 차이는 컸고, 온통 알고 공부해야 할 것들 투성이라 해야 했고, 그렇지만 재미가 있고 하나씩 익히며 해보는, 무언가 차곡차곡 쌓이며 정리되는 기분이 좋았다. 그때의 카페는 혼자 마주한 공간이었다. 집에서 나와 동네를 산책하며 보이는 가까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그즈음 분위기 좋은 다양한 카페들이 많이 생겼던 것 같다. 다양한 커피도 접해보고 맛에 관심이 많이 생긴 것도 그때이다. 가로수길에서 저녁을 먹고 분위기에 끌려 들어가 본, 바 같은 북적이는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주문했다. 작은 잔의 에스프레소 위에 소복이 크림이 올려져 있었다. 티스푼을 들고 커피와 크림을 떠 맛을 보았다. 고소하고 진한 커피 맛 자체가 좋으면서 찬 크림의 부드러움과 달콤함이 잘 어울리는 굉장한 한잔을 마신 것이다. ‘와! 이게 내가 좋아하는 맛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라는 게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후 커피에 대한 궁금증으로 책도 한 두권 보고 때에 따라 원하는 메뉴는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다양하게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이용 시간이라던가 방식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하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하는 장소로 카페가 사용되다가, 보다 전문적인 방식들은 분리되어 만화 카페, 스터디 카페, 워크스페이스 등으로 다소 분산되고, 코로나 19로 이용 시간제한 등을 거치면서 다소 차분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근무시간에 카페에 가서 편안한 분위기로 회의를 하기도 하고, 또 회의실에서 각자 원하는 메뉴의 커피 한잔 즐기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차가운 혹은 따뜻한 한잔과 속하진 않았지만 누릴 수 있는 단정하고 안락함을 주는 편안한 장소의 기능은 분명한 것 같다.
카페란,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커피 가격에 공간 이용에 대한 기타 비용이 추가되어 있는 곳이 많이 생겼다. 어쨌든 기본의 맛에 충실한 곳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아메리카노 한잔에 6000원, 아이스초코 8000원 다른 곳으로 갈까 하다가 오래 걷고 힘들어 들어간 카페라 그냥 주문을 했다. "취향을 잘 몰라서.. 할 때마다 잘 못 맞추겠어요, 농도를. 부족하면 얘기해줘요."라는 말에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나 생각하며 결제를 했다. 역시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지. 밍밍한 콩차 같은 맛이다. 배려 같이 보이는 말이었지만 가격과 맛에서는 배려가 없었다.
뭔가 주문하기가 애매하면, 기성품을 주문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끔 에스프레소를 시키면 듣는 말이다. "원액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설탕은 없습니다, 저쪽에 시럽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괜찮겠냐고 묻는 말에 들어있는 것이 상대를 위한 질문이 아니다.
j는 말했다. "카페에 설탕이 없다니."
카페는 카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