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

by 민광

How are you?

뒤이어 나오는 대답은 백퍼센트.

I'm fine. Thank you. And you?

신기하게도 어찌나 바로 튀어나오는지, 머릿속으로 다른 말을 생각하면서도

결국 입에서 나오는 말이에요.


괜찮지 않은데, I'm Fine.

안부를 물어줘서 고맙지 않아도, Thank you.

너의 안녕을 물을만큼 여유롭지 않아도, And you?


힘들어도, I'm Fine.

관심이 버거워도, Thank you.

혼자 있고 싶지만, And you?


알아주길 바라며, I'm Fine.

다시 한 번 물어주길 기다리면서도, Thank you.

쿨한 척, And you?


내가 힘들거나, 슬프거나, 외롭거나, 화나는 날에도

I'm Fine 이라니

내 감정조차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어른이 된걸까?


그런데 어느 날, 똑같은 대답에 다른 생각이 스쳤어요.

그날도 나는 역시 누군가 "괜찮아?" 라는 물음에

또 "괜찮아."라고 했어요.

신기하게 그날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정말 괜찮은 순간이 떠올랐어요.

정말 괜찮지 않은 날이었는데 그렇다고 괜찮지 않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어요.

따지고 보니, 괜찮은 순간도 꽤 있었더라고요.

어쩌면 그 순간이 진짜 I'm Fine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날에도 찾아보면 기분 좋은 기분은 늘 있었어요.


조용하던 거리에 갑자기 지나가던 차가 나에게 더러운 물이 튄 날 어때요? 완전 I'm not Fine. 그런 날에도, 예쁜 옷을 입으며 콧노래를 부르는 순간이 있잖아요. 아끼던 옷을 입고 나가는 발걸음은 또 어떻구요. 다들 나를 쳐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알죠? 마치 내가 연예인이라도 된 것 마냥 자신감 있게 걷잖아요. 그런데 옷에 묻은 얼룩에 기분 좋은 기분은 사라지죠. 아니, 잊혀진 거죠. 있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슬픈 날도 그래요. 엄청나게 간절히 원하던 시험을 망쳐도, 수능 점심이 그렇게 맛있었어요. 국어시험부터 느꼈죠. 아, 이건 망했다. 그래도 점심은 맛있더라고요. 아직도 기억날 정도니까요. 면접에서 떨어진 날, 맥주를 마시며 먹는 떡볶이는 감탄이 나왔어요.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던 밤에도, 눈물이 흐르면서 정리하던 사진 속 내가 예뻐보이는거 있죠? 나 이때 참 사랑스러웠네 하고요.


외로운 날엔 또 어떻고요. 힘든데 전화해서 털어놓을 사람도 없고, 얘기를 해도 남의 편만 드는, 세상이 나 빼고 다 한편 같은 날에는 그냥 퇴근하고 밥하기도 싫잖아요. 휴대폰을 켜고 SNS에 들어가 '오늘도 너는 행복해 보이네, 어디 좋은데 갔네', 부러워 하지 말고 떡볶이나 치킨을 골라요. 매운게 좋을까, 로제가 좋을까, 기본이 좋을까. 치킨은 후라이드? 양념? 이럴때 그냥 반반. 피자도 좋아요. 고르고 나면, 곧이어 띵동- 봉지를 열면 향이 온 집을 가득해요. 마음의 허기를 대신 채우면, '아 맛있다. 행복 별 거 있나? 아, 행복해.'라는 말이 절로 나와요.


기분 좋은 기분은 늘 있어요. 기분 나쁜 날도 늘 있어요. 아주 많이요.

기분 나쁜 날에 어떻게 내 마음이 기분 좋은 기분을 잊어버리지 않게 할까?


그때 떠올랐죠.

I'm Fine. Thank you. And you?

몇 십년간, 익숙하게 외워온 문장은 우리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나봐요.

안부조차 외우는 상태가 된 걸 보면 말이죠.


어쩌면 이렇게 기분도 보관해보면 어떨까?

기분 좋은 기분이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게.


아무리 알록달록한 풍선이라도, 잡고 있지 않으면 날아가잖아요.

여기다 고리나 추를 매달아 꼭 붙잡고 있으면요?

가을에 수확한 밤을 겨울, 봄, 여름에도 먹고 싶다면

달큰한 설탕에 졸여 담아두면 오래도록 먹을 수 있죠.


옛날에 이런 생각을 한 적 있어요.

지금 이 기분을 병에 담아 보관하고 싶다고 말이에요.

지금 느꼈던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요.

너무 빨리 날아가지 않게,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게,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든든하도록

차곡차곡 담아두는거죠.


기분도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 보관해두고 싶었어요.

오늘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매일밤이 아니라, 밤마다 포근하길 바라면서요.


떠올려보면 꽤나 자주 '기분 좋은 기분'을 느껴요. 금방 휘발되어 잊혀져서 그렇죠.

우리 함께 서로의 기분 좋은 기분을

켜켜이 오래도록 보관해봐요.

생각만 해도 벌써 기분 좋은 기분인데요.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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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