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해인 Oct 28. 2022

백야

어둠을 묻어두고

  태양이 푸른 어둠을 밀어내자 세상이 가까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 해의 끝자락. 허투루 품을 수 없는 만년의 계절. 드넓게 이어진 설원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겨울과 낙원은 어쩌면 동의어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겨울이 있었다. 짙게 깔리는 어둠이 무서워 필사적으로 만양을 뒤좇던... 추위에 혹 마음이 얼어붙으면 어쩌지 노심초사하며 사랑으로 가슴을 덥혔던... 세상을 에워싼 찬바람이 소중한 기억마저 앗을까 거쳐온 시간을 필사적으로 쥐었던 그런 겨울이. 하지만 인간의 체온에 화상을 입는 물고기처럼 나의 추억은 붙들수록 소멸을 앞당겨야 했다. 와중에 절정을 지나온 감정의 행방은 늘 묘연했다. 백지의 원고지 앞에서 밤을 지새워도 쉽사리 떠올리기 가쁜 기억이다.


틱. 티디딕 -


 ‘절정을 지나온 감정’이라는 단어 앞에 잠시 멈추어 선다. 이후 찰나를 머뭇거리다 이내 타자기에서 두 손을 내려놓는다. 글을 멈추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껏 함부로 스쳐온 절정이 지금의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잠시 휴게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서술할 이야기는 이번 겨울 마주했던 절정임을 미리 일러둔다.


 어떤 글을 써요? 늦가을 알게 된 그녀는 초면부터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냥 이것저것이요. 그런 이목이 불편하여 나는 무심하게 일러두고는 했다. 왜 하필 글이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눈앞에 놓인 계란 식빵 토스트를 한입 물었다. 생각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왜 하필 글이냐니.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어영부영 그간 써왔던 문장의 종착지를 더듬었다. 찰나를 잊고 싶지 않아서요. 나름 근사한 임기응변이었다. 한순간 강렬하게 타오른 마음은 더 불이 붙지 않아 우리는 대상으로만 시간을 기억할 뿐이다. 가령 이전의 사랑과 지금의 사랑은 다르다. 그 말인즉슨 나의 사랑에 부속된 인연과 기억이 변질되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시간의 여백에 끼워둔 장면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 추억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고 답했다. 우와 멋지네요. 그녀 역시 식빵을 집어 들었다. 아마 마땅한 대답을 떠올릴 시간이 필요했을 테다. 딱히 쓰고 싶은 글이 있어요? 나는 메뉴판의 코팅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돈 되는 글이요.


 “돈이 안 되는 글은 아무 짝에 쓸모가 없지. 카뮈니 다자이 오사무니, 걔네도 21세기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졸라 자극적인 BL소설을 쓰고 있었을 거라고." 자주 참석했던 작가 모임에선 예술에 대한 담론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예술이 무언가에 저항하면서 힘을 얻는 것에 대부분 동조했다. “빅브라더를 피해 숨을 일도 없고, 당장 매머드를 잡지 못한다고 굶어 죽을 일도 없지. 참 따분한 인생이야. 자살률이 제일 높은 것도 다 그 때문이겠지. “ 나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통오징어에 땅콩이나 잔뜩 먹었다. 불만이 있기 보다도 그 말에 응당한 반박을 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에 동의한 적은 없었다. 이후에 다시 혼자가 될 우리가. 술잔을 기울이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외로움에 저항하고 있지 않은가.


 취기가 오르면 떠난 이들이 불현듯 생각났다. 남몰래 그들의 이름에 담긴 기억을 나란히 추억했다. 번듯한 작별을 이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전에 사랑에 빠진 이는 곳곳에 널린 앙상한 감정을 주워 담는다고 정의한 적이 있다. 그 상태로 누군가와 손이 포개지면 아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 타인을 의심하지도 않고 너무 기대지도 않는 관계, 그곳이 클라이맥스라며. 그 균형이 무너질 때에는 사랑을 노력해야 한다며.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잃어 공허를 느끼지 않기 위해…


어때요?

오 그거 돈 좀 되겠는걸.


 꿈과 현실은 우위를 뒤섞어가며 공생했다. 현실 없이 꿈을 꿀 수 없었고, 꿈이 없는 현실은 보람이 없었다. 그 사실을 일찍 깨달은 우리는 허황된 꿈을 품지 않기로 하였다.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글쟁이는 당장 아사하고 말 테니. 다만 우리는 어렸다. 기껏 꿈에 더 치중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허락되는 나이였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는 없겠죠?" "그래도 돈이 많으면 행복할 거야. 장담해." 행복을 돈으로 구매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 믿음은 일상 속에서 자주 증명되었다. 행복 그리고 증명. 두 단어가 참 짓궂다. 과거의 나는 행복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잘못된 믿음 아래 행복의 요소를 자주 놓치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증명은 날 미워하는 이들을 위해서가 아닌 날 위해주는 이들에게 해야 한다는 것을. 그 사실을 자각한 이후에는 하루가 제법 행복했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쉬운 일은 꿈과 행복의 기준을 한차례 낮추는 것이었다. 궁핍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먼 훗날 그 의미를 추억한다면 그 결점은 찰나가 되리라는 허황된 꿈을 품어보았다.

 내 결핍으로 타인의 결핍을 이해하고 내 기쁨으로 타인의 순간을 자칫 공감했다. 결함이 결핍이 되지 않도록. 과거가 된 이야기로 과거가 될 이야기를 애써 추측한다거나,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유추하지 않으려 했다. 쉽게 말해, 있는 그대로를 보는 방법을 배워갔다. 벚꽃이 필 무렵엔 설경을 그리워했고, 흰 눈이 세상을 덮을 무렵 벚꽃을 마중 갔다. 계절은 언제라도 다시 찾아오니 그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계절을 앞당기고자 하는 과정에서 놓친 인연이 참 많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소멸이 확정되어 있다. 나약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겹겹이 쌓인 눈송이처럼 서로가 마음을 덮어주는 것뿐이었다. 


 아울러 스스로를 의심했던 이유를 따져 보았다. 걸어온 뒷길은 어두컴컴하였고 긴 터널을 지나도 밤일까 두려웠다. 열차가 선로 위를 나란히 달릴 수 없듯 각자가 순차적으로 자리를 유지하는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와도 공존할 수 없다고 믿었다. 행복이라는 종점에 겨우 도달하면 그곳은 일종의 출발지가 되어 또다시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랬다. 어둠은 너무나도 투명해서, 불투명한 나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급히 결말을 짓고 절정을 떠나려 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나의 실수와 결함.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기억되고 싶은 미래. 불안과 외로움, 그리고 돈. 이후에 아주 잠깐 마주치는 소중한 인연들과 쌉싸래한 농담... 큰 불행은 작은 행복으로 자주 부수어졌다.


 아니지, 그 행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행복과 꿈의 기준을 여러 차례 낮추니 결국 남는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웃을 때 나도 기쁘다. 그들이 아프면 나도 슬프다. 소중한 인연의 결핍을 보듬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순간 나는 빠르게 자전했다. 마침내 봄이 살며시 가까워졌다. (2022.1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