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카페의 절대 권력자는 단연 아메리카노다. 하루에 200잔도 넘게 팔리며 하루 매출의 절반 가까이를 책임진다. 하지만 오후만 되면 아메리카노 제국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서서히 세대교체의 기운이 감지되는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의 기세는 오후가 되면 눈에 띄게 꺾인다. 특히 금요일 오후면 더욱 그렇다. 그 자리를 조용히 차지하는 건, 바로 디카페인 커피다. 아침에는 치열하게 일하기 위해 카페인 연료를 들이부었다면, 오후에는 ‘치열한 휴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디카페인을 주문하는 목소리에서 ‘이젠 쉬고 싶어요’라는 마음을 듣는다. 그 마음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러지 못했던 지난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들었는데, 내가 일하던 때의 방송 작가, 특히 막내 작가는 24시간 늘 온라인 모드였다. 작가님이든, PD님이든, 게스트든 모든 연락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연락에 빠르게 응답하는 것은 막내 작가의 덕목이었고, 그때 생긴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하는 습관’이 아직도 남아있을 정도다.
워낙 변수가 많은 환경이고, 내 몫을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 없다 보니 쉬는 날은커녕, 퇴근 후 약속을 잡기도 어려웠다. 어느 날은 큰맘 먹고(?) 퇴근 후 영화관에서 <비포 미드나잇>을 봤다. 제시와 셀린느가 한창 다투고 있는데, 자꾸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이틀 뒤 촬영하기로 한 게스트, 정확히는 게스트의 비서 전화였다. 한두 번 무시했더니 문자가 왔다.
‘센터장님께서 이번에 출연하기 어렵다고 하시네요.ㅠㅠ 다른 분을 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촉박하게 알려드려 죄송해요’
10년이 넘어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대충 저런 내용이었다. 그 문자를 본 순간, 영화관 의자에 앉아있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했다. 자리를 박차고 행여나 폐가 될까 거대한 몸을 한껏 접어 영화관 밖으로 나와 통화를 했다. 사유는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라 단순한 변심이었다. 나는 급히 사정을 설명하며 방송이 무산되지 않게 해달라고 읍소했고, 겨우 방송 펑크를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비포 미드나잇> 이야기는 아직도 미완성이다.
한동안 나는 방송작가를 하기 싫은 이유로 환경 탓을 많이 꼽았다. 쉴 시간이 없고, 변수가 많고, 박봉이고 등등. 하지만 그 불편한 환경을 바꾸기 위해 나는 무엇을 했나 생각해 보면, 딱히 없다. 푹 자기 위해 디카페인 커피를 선택하는 것마저도.
예전에는 나를 소진해 가며 열심히 하는 것만이 최선을 다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어디선가 그랬다. 그건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거라고.
이제는 나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려고 한다. 일을 잘 해내는 것보다, 나를 잘 돌보는 것이 더 오래간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그렇게 나는 내 삶의 옵션에 디카페인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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