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밥,밥, 또 밥
내 정신은 언제부터 가출한 걸까?
출산 때문이라고 우겨보지만 사실 그 전부터 슬금슬금 집을 나갔던 것 같다. 그땐 챙길 게 적으니 티가 덜 났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내가 한 번 깜빡하면, 아이 준비물부터 방과 후 수업 신청, 학원 스케줄, 집안 행사까지 줄줄이 놓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정신 좀 봐….’ 하며 한숨을 쉰다.
그날도 그랬다. 아이 소풍을 깜빡했다. 전날 집에 손님이 오셔서 늦게까지 웃고 떠들다 보니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보내고 나서야 달력의 빨간 동그라미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시락도 없이 소풍을 간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차올랐다. 소풍이 끝난 오후,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해서….”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친구들이 자기 도시락 나눠줬어요. 00이도 씩씩하게 잘 놀았습니다.”
그 한마디에 참았던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괜찮다는 말이 이렇게 따뜻할 줄 몰랐다.
나만 이런가? 나만 이래? 주위를 보면 다들 멀쩡하다. 학교 앞에서 만나는 엄마들은 단정하고, 잊은 것도 없이 기억력도 철저하다. 다들 정신이 없다 하면서도, 신기하게 잘 해내고 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만들었다. 잘 해야 돼, 놓치면 안 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 못해도 돼. 뭐 어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정신을 붙들려고만 하면 너무 힘들다. 가끔은 그냥 풀린 채로 놔두자. 그래도 괜찮다. 큰일 안 난다. 내가 그래봐서 안다.
소풍 도시락을 깜빡해도, 아이는 씩씩하게 놀고 돌아왔다. (물론 ‘까먹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하루에 세 끼나 먹으라는 건 대체 누가 정한 걸까? 그 사람 밥해 본 적은 있나 모르겠다!
매일 아침, 학교 가는 아이는 바쁘니까 대충 빵이나 주먹밥으로 때운다.
아침 메뉴 고민은 공부 하나도 안 하고 치는 중간고사 같다.
때만 되면 찾아오는 시험인데, 또 준비는 안 돼 있다.
남편은 이미 출근했다.
식탁 위엔 어제 밤 남편이 배달시켜 먹은 플라스틱 용기가 그대로 놓여 있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며칠 전 사둔 달걀이 여전히 박스째.
아이를 보내고 난 후, 점심은 나 혼자다. 어제 남은 배달 음식
아니면 김밥 한 줄로 끝, 그리고 저녁, 아이랑 둘이 있을 땐 돈가스나 카레, 미역국처럼 익숙한 메뉴로 해결하는데…. 진짜 고민은 남편까지 집에 있는 날이다.
남편이 야근하고 늦게 오는 평일엔 내가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밥을 차려줄 수 있다.
그런데 그걸 못하고 모른 척 잠든 적도 많다.
하지만 주말은 피할 수가 없다.
냉장고 문 앞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냉장고 속에는 재료가 가득한데 메뉴는 없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묻는다.
“여보,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 해줄 것도 없으면서 습관처럼 묻는다. 그러면 남편은 늘 비슷하게 대답한다.
“음…. 글쎄? 우리 회 먹은 지 좀 되지 않았어?”
아, 또 그 놈의 회. 내가 먹을 거 없다 할 때마다 회를 시키는 우리는 부르주아 가족.
그렇게 나는 주문조차 할인쿠폰을 기가 막히게 쓰는 남편에게 위임했고, 얼마 후 음식이 도착했다.
“왔다!”
오늘의 우리 집 셰프는 25분 만에 왔다. 별점 다섯 개짜리.
아마 하루 중 가장 바쁜 순간이 아닐까. 배달 음식 비닐 뜯고, 용기 뚜껑 열고, 플라스틱 그릇을 식탁에 줄 세우는 시간. 밥 할 힘은 없으면서, 배달 음식 차릴 힘은 있네. 비닐을 뜯는 손놀림이 익숙한 듯 비장하다.
“어…. 이게 다야? 얼마야, 이거?”
“3만 5천 원.”
“이게 3만 5천이라고? 세상에.”
물가는 비싸고, 냉장고는 복잡하다. 나는 또 쩔쩔맨다.
그래도 오늘은 이미 시켰으니 어쩔 수 없지. (설거지도 없다, 아싸.)
그래도 ‘내일은 꼭 저녁을 해줘야지.’ 매번 다짐은 한다.
오늘도 남이 차려준 하루를 물컹물컹 씹어 삼킨다.
내일 고민은 내일 하자. 오늘은 일단 먹자. 맛있으니까!
나는 남편 앞에 깻잎쌈을 하나 정성껏 싸서 말한다.
“여보, 회에 소주가 빠지면 섭하지.”
지금, 오늘 저녁 뭐 먹을지 고민하고 있진 않나요?
잠깐만요!
일어나지 말고, 냉장고 안을 굳이 열지도 말고요.
지금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재료
세 가지를 적어봐요.
이 세 가지로 만들 수 있는 메뉴를
한번 떠올려보세요.
생각보다 괜찮은 조합이 있을지도 몰라요.
저는... 음...
김치, 깍두기, 계란, 우유, 체다치즈, 생크림, 부추, 양배추, 소세지,떡볶이 떡, 떡국떡, 무 ,고체치즈, 하몽,
뭐... 생각보다 많이 생각나는데요?
이걸로... 오늘 저녁 뭘 할 수 있을까요?
감치볶음밥? 로재 떡볶이? 양배추 샐러드?
주부 고수님들 계시나요?
냉장고에 뭐 있으세요? 아님, 이걸로 저 뭐 만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