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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독 바다청년 Oct 25. 2023

왜 하필 독일이었을까

만 18세도 채 되기 전에 얼떨결에 진해로 가서 여러 곡절 끝, 졸업한 지 2년 반 정도 지났을 때쯤인가.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이 동기에는 참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불투명했고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오랜 시간 울타리 속에서 살았고, 울타리 너머의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 무지했고, 두려웠다. 흔히들 ‘그 힘든 과정을 겪었는데 밖에서 못 할 일이 무엇이냐’는 안팎의 이야기에 기대면서도 울타리 밖에서는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한 나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반년 아니, 1년 가까운 시간이 더 필요했다. 지금은 그게 진로 탐색의 기간이었다고 생각해본다.


큰 산이라고 생각했던 토플 점수만 땄지, 그때까지만 해도 뭘 하고 싶었는지 잘 몰랐다. 내게 매번 독일로의 유학을 권고했던 아버지에게 가끔 물어보곤 했지만, 아버지도 사실은 세부적인 대학 지원 방법에 대해선 몰랐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내 학력, 졸업장으로, 내가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나만이 알 수 있었다는 걸 꽤 나중에나 깨달았다.


그렇게 시간을 한 두어 달 보냈을까. 까막눈인 독일어부터 어떻게 해보자는 마음이 생겨 학원에 등록했다. 남산 언저리에 있는 주한독일문화원. 두 달 정도 다녔을까. 코로나가 터지고 모든 게 온라인 수업으로 바뀌었다. 독일문화원을 그렇게 1년 2개월을 꾸준히 다녔다, 그렇다고 독일어 실력이 늘진 않았다.


마침내 2021년 2월 말. 5년간의 입던 군복을 벗게 됐고, 길고 긴 기다림의 끝. 6월 초중순, 가고 싶은 학교의 서류 합격발표를 받았다. 신났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른 학교에서는 최종 합격발표를 받았다. 우습게도 그때는 내가 좀 뭐가 되는가 싶었다. 안타깝게도 3주가 지나고 그 두 기회가 모두 날아갔다. 한 학교는 사관학교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했고, 한 학교는 면접에서 떨어졌다.


순식간에 바뀐 내 운명에 좌절했고 침울했다. 이전부터 밖에 나가는 순간, 내가 한 게 그다지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9년간의 모든 삶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늦었지만 새로운 길을 알아본다고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온갖 학교를 다 뒤졌다. 그때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그때 느낀 게 있었다.



독일을 가고 싶어서 가는 것보다도 독일이 아니면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건 순전히 돈 때문에. 다른 나라의 학교를 들어가서 그 정도의 학비를 내는 게 가치가 있는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는 대안으로 국내 석사도 알아봤고 실제로 지원도 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이 일이 떠올랐다.


산에 오를 때면 어르신과 정상이나 산 중턱에서 만나는 일들이 있다. 특히 정상에서 어르신들은 다과를 주며 젊은이가 어째 평일에 혼자 산을 타느냐고 묻곤 했다. 그중 몇몇 어르신은 본인이 젊었을 때 사관학교를 지원했었다고 한다. 누구는 성적이 안 돼서, 누구는 신체의 특정 부위 때문에 불합격했다며 아쉬워했다. 물론 그 어르신은 다른 분야에서 성공하셨겠지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이나 미련 같은 게 남아 있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 일로 독일에 가기를 포기한다면 내가 그 어르신들처럼 30년 후에 후회 비슷한 걸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뇌리에 박혔다. 누군가에게 “내가 30년 전에 독일 석사를 붙었다가 떨어졌었다.”라고 이야기하며...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하니 싫었다.


그래서 다른 길을 찾기로 했다. 학부도 찾아봤다. 학부를 영어로 수업하는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없었는데, 그 학과가 흥미롭게 보였다. 당장 자소서를 하루 만에 수정하고 그다음 날 검토하고 바로 지원했다. 지원하고 오랜 기간 지나지 않아 서류에 합격했다고 면접 날짜가 잡혔다.


그렇게 8월 중순, 합격발표를 받았다. 학부였지만 기뻤다. 그래도 한 발짝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게.

2021년 9월 26일. 나는 한국을 떠났다.


장도의 시작…

집을 나서기 전엔 걱정이 가득했다면,

집을 나서고 나선 별 생각이 안 든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건대, 살면서 내 뜻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 그 어떤 의무감도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도록 하자.


새 삶의 첫 발걸음, 독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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