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살인의 기억

무의식의 살인자 3화

by 정준영

*이야기에 나오는 이름과 단체, 사건 등은 모두 창작의 산물입니다.

Microsoft Bing AI 이미지

가난한 두 모녀를 무참히 살해한 범인이 유명 증권사의 애널리스트라니. 언론사들은 기사 야마를 어떻게 뽑아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네티즌들 사이에선 범행 동기에 대해 추측이 난무했는데, 가장 인기가 많은 가설은 다음과 같다.


'두 모녀는 원래 부자였다. 그런데 라미의 추천으로 목돈을 투자했다가 빚더미에 깔려 반지하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양측은 원수지간이 됐다. 서로 갈등을 지속하다가 라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두 모녀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소설같은 얘기였고, 실제 사정은 딱히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두 모녀나 라미 모두 SNS는 일절 하지 않았고 사정을 알고 있을 법한 주변 인물도 없었다. 언론은 그저 규홍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규홍은 아무말 없이 세간의 호기심을 증폭시키기로 했다. 마치 극적인 살해 동기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규홍의 전략은 효과가 있었다. 라미가 검찰로 이송되던 날 경찰서에 취재진 수백 명이 몰렸다. 라미가 유치장에서 나오자 카메라 셔터 소리가 기관총처럼 터져 나왔다. 기자들은 먹잇감을 발견한 개미 떼처럼 라미에게 들러붙었다. 그리곤 더듬이같이 생긴 무선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왜 두 모녀를 죽이셨어요?” “피해자에게 원한이 있었나요?”


하지만 라미는 후드티를 얼굴까지 뒤집어쓴 채 일언반구 없이 호송차에 탔다. 규홍은 이 광경을 경찰서 현관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메라 조명들이 마치 자기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처럼 느껴졌다. 경찰 짬밥 수십 년 동안 이처럼 짜릿한 적은 없었다.


호송차가 떠나자 기자들은 기자회견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먹이를 달라고 보채는 뻐꾸기 새끼들처럼 규홍이 입 열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규홍은 막상 할 얘기가 많지 않았다. 라미는 줄곧 범행 기억이 없다고 주장했다. 모르쇠 전략을 펴는 범죄자들을 수도 없이 봤지만, 라미는 분위기가 달랐다. 라미의 말대로라면 그는 그날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물론 알리바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 반면 현장에서 발견된 DNA는 라미를 지목하고 있었다. 피해자의 집 현관 손잡이에서 지문이 발견됐고 거실 바닥에선 머리카락이 나왔다. 법원이 구속영장을 내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규홍은 영 아쉬웠다. 라미와 피해자 사이 연관성은 집이 근처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한이 있을 구석이 없었다. 라미는 사이코패스와도 거리가 멀었다. 범죄심리학자들은 라미에게서 어떤 특이사항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순 없었다. 이 사건은 여기까지인 거다. 기자들은 실망한 채 회견장을 빠져나갔고, 그날 오후엔 경찰 수사력의 한계를 조롱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검찰 단계에서 보완 수사가 진행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첫 번째 공판에서 읊어주는 공소사실은 경찰 수사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미의 변호인은 무죄를 주장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과 머리카락 외에 CCTV 영상이나 목격자 등 다른 증거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라미는 평소 불면증을 앓고 있는데, 사건 당일에도 밤늦게까지 일을 하다 수면제를 먹고 정신없이 잠을 잤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라미는 독신이었기에 그의 알리바이를 증언해 줄 사람은 없었다. DNA 증거력을 무력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기자들은 서울 외곽의 북부지방법원까지 오느라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며 투덜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수가 데리고 있는 수습기자가 남부지방법원에서 사건을 하나 찾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라미 사건과 비슷했다. 갑수의 촉이 꿈틀거렸다.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4화에서 계속)

keyword
이전 02화증거가 가리키는 용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