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음량으로 설정해 놓은 휴대전화 알람이 허름한 빌라를 뒤흔든다. 김라미는 한참 뒤에야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침대에 걸터앉아 팔다리를 훑어보는데 역시나 멍투성이다. 발에는 흙이 묻어있다.
'또 간밤에 집 밖으로 나갔다 온 걸까.'
라미는 불면증 환자다. 수면제 졸피뎀을 먹어도 곧바로 잠들 수 없을 정도로 중증이다. 새벽까지 뜬 눈으로 뒤척이다가 부지불식간에 기절해 버린다. 그런데 아침엔 어김없이 온몸이 엉망진창이다. 예전에 졸피뎀의 부작용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비슷한 현상이 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약을 끊기는 어렵다. 부작용쯤이야 잠 못 이루는 고통에 비할 바 아니다. 사실 라미는 주치의인 서양필에게 부작용에 대해 상담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양필은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이후론 라미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라미는 잠을 깰 겸 TV 뉴스를 틀었다. 간밤에 살인사건이 났는가 보다. 피해자는 여성 두 명, 모녀 사이로 추정된다. 아직 용의자는 경찰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뉴스에 나오는 사건 현장이 눈에 익다. 이 동네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살짝 소름이 끼친다.
그런데 지금 이 사건이 중요한 게 아니다. 여의도에 있는 라미의 직장 ○○증권까지 출근하려면 갈 길이 멀다. 오늘도 할 일이 많고,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각할 순 없다. 라미는 성과급을 받는 대로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수면제 약통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 윌 아큐파이(I’ll occupy), 아이 윌 헬프 유 다이(I’ll help you die)…‘
8월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달동네 언덕을 오르는 남자. □□□ 방송국의 7년 차 기자 정갑수다. 회색 와이셔츠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 얼룩덜룩해졌다. 갑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늘에서 숨을 돌린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자 메탈리카의 명곡 ‘마스터 오브 퍼펫(Master of Puppet)’이 매미 울음소리처럼 요란스럽게 쏟아진다.
갑수는 사건 현장 주소를 알아내는 데만 진을 다 빼버렸다. 어차피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건만 요즘 경찰은 수사 사항은 기밀이니 어쩌니 하며 왜 말을 안 해주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현장 가는 길도 만만찮다. 갑수는 어렸을 때 살던 동네 이후 이런 달동네에 와보긴 처음이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과학수사대 차량이 눈에 들어온다. 현장 감식이 진행 중인가 보다. 근처에서 갈색 바람막이를 입고 담배 피우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푸석푸석한 얼굴에 짧은 머리, 누가 봐도 형사의 관상이다.
그는 서울경찰청 조규홍 강력계장이었다. 관할서는 따로 있었지만, 뉴스까지 탄 사건이다 보니 서울청이 붙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얘기지만 실은 규홍이 자진해서 사건을 맡았다. 규홍은 소위 ‘얘기되는 사건’을 재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젊은 나이에 서울청 강력계장까지 고속 승진한 이유다.
갑수는 규홍이 초면이었다. 사건기자로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갑수는 경찰과 친해지는 데는 별 능력이 없었다. 경찰과 밥 한 번 먹으려면 전화나 문자로 졸라야 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 귀찮았다. 어렵게 만나도 정작 할 얘기도 없다. 경찰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심지어 여행까지 다니는 동료 기자들이 갑수는 신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했다. 기사를 쓰려면 정보가 필요하니까.
규홍은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갑수를 눈치챘다. 경찰도 생김새를 보고 기자 여부를 판별한다. 이런 더운 날에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큼직한 백팩을 메는 족속은 기자뿐이다. 규홍은 일부러 담배를 깊게 빨고 먼 산을 바라보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규홍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수는 규홍 옆에 바싹 붙어 전자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초면이라도 같이 알사탕을 오물거리든 담배를 피우든 하면 경계감을 늦출 수 있다는 얘기를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뭐 좀 나왔어요?”
갑수는 전자담배를 쥔 다른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규홍은 폰 화면을 곁눈질했다. 아마 녹음기가 켜져 있을 것이다. 규홍은 반절도 넘게 남은 담배를 땅에 떨군 뒤 발로 비벼 껐다.
“이제 막 조사 시작했는데 뭐가 나왔겠어요?”
규홍은 갑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등을 돌려 범죄 현장인 반지하로 들어간다. 갑수는 폴리스 라인에 가로막혀 갈 수 없는 곳이다. 갑수는 ‘재수 없는 놈’이라며 속으로 구시렁댔다. 기분이 상했다. 담배를 있는 힘껏 빨아 폐부를 가득 채운뒤 한숨 쉬듯 토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