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을 치지 않은 이유
우리 텃밭 주변을 둘러보면 녹색 망이 곳곳에 쳐져 있다.
예전엔 단순히 구획을 나누는 용도인 줄 알았다. 직접 텃밭을 해보니 그 정체를 알게 됐다.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고라니망’.
그 망을 치지 않으면 고라니들이 와서 작물을 다 먹어버린다고 했다.
우리 밭에는 고라니망이 없다.
처음엔 돈을 아끼려는 마음이 컸고, 보호할 만큼 많은 작물을 심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상황은 달라졌다.
첫해에는 고라니 흔적을 거의 못 봤다.
둘째 해엔 상추를 조금 뜯어먹고 똥만 싸놓았다.
비트는 안 건드려서 셋째 해에도 비트를 심었는데… 이번엔 비트 새싹이 남아나질 않았다.
상추도 씨가 말라버렸다.
마치 뷔페를 즐기듯 이것저것 맛을 보고는, 먹을 만한 건 다 먹어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 밭이 ‘고라니 맛집’으로 소문난 게 아닐까 웃음이 났다.
남편과 엄마는 “죽 쑤어 고라니 준다”며 대책을 세우자고 했다.
엄마는 안 쓰던 모기장을 가져와 작은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상추를 키워 보기로 했다.
나는 다른 길을 택했다. 고라니가 먹지 않는 향채소들을 찾아 심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게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집 근처 호수 산책길에서도 고라니를 본 적이 있다.
데크 길을 걷다가, 풀숲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나를 바라보던 고라니와 눈이 마주쳤다.
몇 년 후면 그 숲도 베어지고, 그 자리엔 새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사람들은 안전하고 쾌적한 곳을 찾아 끊임없이 옮겨 간다.
이미 개발된 구시가지를 떠나 더 넓고 새로운 아파트를 짓는다.
그 과정에서 고라니들은 밀려나고, 또 밀려난다.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마음이 쓰리다.
고라니 금지 구역이 단 1평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앞으로도 망을 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사는 길을 고민하려 한다.
텃밭은 결국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흙 위를 밟는 모든 생명과의 조용한 대화이자,
내가 세상을 어떻게 대할지 스스로에게 묻는 자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