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무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흰 패딩이 잘 잘 어울리는 어린 후배, 내게 태민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첫눈에 반했을지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당시 나는 끔찍한 서울살이에 지쳐있었다. 낮에는 가벼운 만남을 이어나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주고받으며 누구도 진심으로 서로를 궁금해하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밤에는 손끝을 더듬어 누군가를 끌어안는 것처럼 웅크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팔을 뻗었다. 잠자리에 들 때면 누군가 연락 오기를 기다리면서 휴대폰을 몇 번씩 확인했다. 무엇을 답해야 할지 모르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 너무 외로워. 힘들어.’ 이 말을 씹어 삼킨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따금 민준이 내게 안부를 물었지만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답장하지 않은 건 게으름이나 무관심이 아니었다. 그건 오래된 상처가 자꾸만 손등을 긁어대는 탓이었다. 괜찮다고 거짓말하기도 싫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부담스러웠다.
민준의 짧은 문장 하나가, 아무렇지 않은 안부 한 마디가, 내가 아직 묻어두고 있는 사랑의 무덤을 다시 파헤칠까 봐 두려웠다. 나는 그 무덤 앞에서 몇 번이고 무릎을 꿇어 애도했지만, 애도의 방식이 꼭 외부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었다. 누구에게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사적인 불행이었고, 그래서 나는 말을 삼켰다. 처음 사랑이 실패했을 때 나는 온몸으로 자기 연민을 삼켰다. '내 탓'이라고 단정 짓는 순간들이 이어졌고, 그 탓들로 내 안의 방은 점점 좁아졌다. 사랑이 한 번 죽어버리면, 그 죽음을 애도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바람이 모든 것을 치워버리는 동안 나는 그 죽음을 조용히 안고 다녔다. 민준의 메시지는 그 죽음이 아직 도로 위에 놓여 있다는 걸 상기시켜서, 나는 답장을 통해 그 상처를 다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안부를 받으면서도 모른 척했고, 그의 선의가 내게 닿지 않게 스스로 문을 닫아두었다. 답장은 언젠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언젠가'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같이 무덤 앞에 서서 마지막 인사를 건넬 준비가 되었을 때뿐일 것이다.
“엄마, 준이 이번 수능은?”
“저번보다는 잘 쳤다고 하던데, 모르겠네 지가 말을 안 하는데 알 수가 있나.”
“이번에는 그냥 붙으면 가라고 하자. 언제까지 시험만 칠 거야.”
“... 그래도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하잖아. 니 동생 불쌍하다.”
나는 그 대화 옆에서 조용히 밥을 씹었다. '불쌍해? 뭐가? 집에서 공부만 하는 정준이 뭐가 불쌍해?' 말은 꺼내지 않았다. 꺼내는 순간, 내 안의 불만이 부모님의 시선에 비쳐 ‘이기심’으로 바뀔 것이 뻔했으니까.
서울에 올라와서 나는 늘 버려진 기분이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길, "괜찮다, 잘하고 있다"라는 말을 해주길 바랐지만 그런 건 없었다. 집에서는 언제나 "동생이 힘들다"라는 이야기뿐이었다. 나의 힘듦은 말할 틈도, 꺼낼 자격도 없는 것 같았다.
내 알바비는 고스란히 월세와 생활비로 빠져나갔다. 남는 돈은 거의 없었고, 가끔 주말에 친구와 밥 한 끼 먹는 것도 사치였다. 길 위를 걸을 때마다 서울은 나를 삼켜버리는 도시 같았다. 빌딩 숲은 화려했지만, 그 안에서 나는 그저 작은 점 하나였다. ‘버티다 무너져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장녀 역할을 강요했다. "알아서 잘 지내고 있는 큰딸." 부모님이 안심할 수 있도록, 내 어려움은 숨기고 동생 뒷바라지에 힘을 보태는 존재. 도움을 요청하면 부모님은 아마 도와주셨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손을 내미는 순간, 내가 짊어진 ‘첫째의 역할’을 배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 돌아오는 원룸은 신발 몇 켤레만 두어도 꽉 차는 좁은 공간이었다. 창문을 열면 옆 건물의 벽돌 벽이 바로 보였고, 밤이면 사람들의 TV 소리가 벽을 타고 스며들었다. 나만의 공간이어야 할 방은, 사실상 또 다른 감옥 같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버려진 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