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문득 그리운 날에는
01. 엄마 밥상
프랑스에 와서 바게트만큼 많이 먹게 되는 음식 중 하나가 크레이프다. 크레이프는 만들기가 간단해서 주로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주말 아침으로 윤이와 함께 반죽하고 굽기 시작했다. 만들 때마다 첫 번째 장은 왠지 모양이나 두께가 항상 조금씩 아쉽게 된다.
- 첫 크레이프는 항상 잘 안되네.
- 할머니도 그랬어?
- 글쎄, 할머니도 그랬을까?
아이의 뜬금없는 할머니 소환에 아침부터 엄마가 끓여주는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 훌훌 먹고 싶어졌다. 언제쯤 엄마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한테 더 자주 들러 맛있게 먹어 둘걸. 배부르다고 남기지 말걸. 잘 먹는다고 좋아하던 엄마 얼굴을 더 자주 살펴볼 걸 그랬다. 이렇게 오늘도 소원 하나에 후회 하나를 같이 쌓았다.
02. 이때가 그리워
저녁을 먹고 아이와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웃으면서 놀던 아이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지난여름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 그때 있잖아. 리솔이 누나랑 물 있고 풀 있고 돌멩이 많이 있는 데서 놀았던 거 기억나?
- 그럼, 기억나지. 엄마한테 사진 있는데 볼래?
- (사진과 영상을 한참 번갈아 가며 보더니) 이때가 그리워...
리솔이는 한국에 있을 때 매일 같이 서로의 집을 오가던 이웃집 누나다. 윤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함께였으니 떨어져 있는 게 어색할 만도 하다. 아이의 기억 안에 한국에서의 일들은 점점 희미해져 가지만 리솔이와의 추억은 불쑥불쑥 또렷이 기억해 낸다. 정작 우리가 살던 집은 가물가물해하면서 리솔이네는 구석구석 기억하고 있다. 아이가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린다. 너무 일찍 그리움을 알아버렸다.
03. 할아버지랑 읽은 책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을 살펴보던 아이가 갑자기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외쳤다.
- 엄마! 이거 할아버지랑 읽은 책이야! 할아버지랑 공항 가기 전에 같이 읽었어!
코로나 바이러스가 있기 전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부모님이 파리에 오셨다. 아이는 이 책 저 책 참 많이도 읽어달라고 해서 부모님은 머무는 내내 목이 쉬도록 읽어 주시곤 하셨다. 한국에 다시 돌아가는 날에도 캐리어 옆에 두고 마지막까지 책을 읽어주셨는데 그걸 기억하곤 읽어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때 할아버지랑 했던 말과 행동을 종알종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서 울컥했고 아이는 신났다. 아이는 누군가가 보고 싶은 날 그 사람을 떠올리며 신나게 추억한다. 그러면서 불쑥 찾아오는 그리움의 감정을 마주한다.
04. 아빠 보고 싶다
오랜만에 대면 수업이 있어 신랑은 학교에 하루 종일 있어야 했다. 아이는 항상 같이 있던 아빠가 곁에 없으니 오전 내내 허전했던 모양이다. 낮잠 자려고 누웠는데 아빠가 보고 싶다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 옆에 누워 토닥거리며 엄마도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에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 엄마 아빠는 지금쯤 뭐 하고 계실까?
저녁은 드셨을까?
할머니랑 텔레비전 보면서 과일을 먹고 계실까?
아니면 소파에 앉아 꾸벅 졸고 계실까?
아니면 창밖에 지나가는 비행기 불빛을 보며 우리 윤이 언제 오려나 하고 계실까?
문득 아빠 생각이 나서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점점 목이 메어왔다. 이야기는 멈추고 아이가 잠들 때까지 말없이 토닥였다. 아이는 잠들었고 마음은 찌릿 저렸다.
05. 아이의 기도
매주 토요일은 동네 성당 앞에 작은 시장이 선다. 시장에서는 주로 제철 과일들을 산다. 오늘은 한참 맛있는 무화과를 사러 시장에 갔다. 과일을 사려고 하는데 윤이가 성당 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는 들어가 보자고 했다. 성당 안을 돌아보던 아이가 갑자기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 바이러스 빨리 사라지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가족들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할머니 할아버지 건강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할 줄이야.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아이에게도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싶어지는 요즘인가 보다. 몸의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매일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아도 항상 마음속에 있었나 보다. 어서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06. 이사 가기 싫어!
파리의 비싼 월세는 유학생 부부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전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 윤아, 우리 이사하려고.
- 왜? 나는 여기가 좋아. 이사하기 싫어!
- 응. 엄마도 그래. 그런데 우리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을 찾아보고 싶어.
- 절대 안 돼. 절대 안 가.
- 속상하지. 대신 약속할게. 이 집처럼 꼭 윤이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볼게.
낯선 곳에서 처음 마음 붙이고 정든 동네라 쉽사리 떠나기로 결정하기까지 힘들었다. 새로운 곳에서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 본다. 여름날의 반짝임처럼 문득문득 그리울 곳이 하나 더 늘었다.
07. 에펠탑 보러 가고 싶어
프랑스는 확진자가 늘면서 다시 봉쇄령이 내려졌다. 집에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제한되었고 통금시간이 생겼다. 나는 통금과 봉쇄라는 단어를 역사책에서 꺼내 나의 일상으로 살기 시작했다. 몇 번의 봉쇄로 이런 일상도 익숙해져 갔다. 거리 제한이 완화되던 날 아이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말했다.
- 엄마, 나 에펠탑 보러 가고 싶어. 이제 보러 갈 수 있는 거지?
- 응! 지금 보러 가자!
아이 마음에 품어진 그리움들이 넘치기 전에 우리는 파리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엄마나랑친구할래 #오늘의이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