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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민 Jan 12. 2022

낯선 곳에 스며들기

02 | 낯선 곳에서 적응하기

  저녁 6시, 우리는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아 파리로 가는 택시를 타고 임시로 지낼 숙소로 향했다. 신랑과 아이는 긴 비행이 힘들었는지 차가 출발하자 금세 잠이 들었다. 옆에서 잠든 두 사람 너머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이 방금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에 본 듯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서서히 물들어 가는 석양을 바라보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좁은 택시 안이라 혹시나 누구라도 눈치챌까 싶어 꾹 참아보려고 해도 소리 없는 눈물이 한참 동안 흘러내렸다. 


  프랑스에 가기로 정하고 난 후 떠나오는 날까지 각종 행정 일들로 정신이 없었다. 공항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면서도 마음이 분주했다. 오랫동안 살던 곳을 떠난다는 걸 인지할 겨를이 없었다. 곧 도착한다는 기사님 말씀에 눈물을 꼴깍 삼키고 아이와 신랑을 깨웠다. 그사이 깜깜한 저녁이 되었다. 


  숙소에 도착해 열쇠를 건네받고 신랑은 근처 마트에서 물과 간단히 먹을 것들을 사러 나갔다. 그사이 나와 아이는 가지고 온 짐들을 풀고 한 달 동안 지낼 숙소의 물건들을 사용하기 편하게 정리해 두었다. 다음 날 아침 프랑스 전화번호를 개통하고 앞으로 살 집을 구하러 나섰다. 눈앞에는 여행지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이미 몸과 마음은 빨리 집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에 즐길 틈이 없었다. 


  매일 셋이서 집을 보러 나섰지만 집을 구할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집을 만나도 집주인이 우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집주인이 세입자를 선택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에 긴장의 끈은 더 팽팽해져 갔다. 이날도 집을 두어 군데 보고 저녁 어스름에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신랑은 더위에 지친 아이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향했고 나는 마트에 들러 장을 봐서 가기로 했다. 


  과일 코너에 가니 멜론이 끝물이라 저렴하게 팔고 있었다. 멜론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으려고 하는데 옆에 계신 할머니께서 손을 저으신다. 익숙하지 않은 프랑스어가 속사포처럼 들려오니 몸이 절로 바짝 굳어버렸다. 할머니는 이내 나의 프랑스어 실력을 눈치채시곤 천천히 몸동작과 함께 다시 이야기해 주셨다. “멜론을 고를 때는 일단 멜론 아래쪽에 코를 대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지 맡아 봐야 해요. 이렇게 킁킁. 그리고 너무 가볍지 않은 멜론을 골라야 해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그동안 쌓인 긴장의 끈이 스르르 툭 하고 끊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 장바구니 안에는 할머니가 골라 준 멜론 두 개가 담겨있었다. 유난히도 선선하던 바람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날 이후 집을 구하러 가는 길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의 풍경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특히 궁금한 게 많은 아이와 함께하니 더 자주 걸음을 멈출 수 있었고, 아이 덕분에 사람들이 자주 다가와 마음을 나눠주었다. 집을 확인할 때 집 상태뿐 만 아니라 집을 보러 가는 길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인사도 중요해졌다. 아이에게 다정한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많았던 곳에 더 마음이 갔다.


  아이의 바람이 통했던 걸까? 한 달이 지나고 마침내 67번째로 본 집에서 계약하자고 연락이 왔다. 아이가 좋아하는 에펠탑이 골목에서 보이고 임시 숙소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던 집이었다. 우리에게 좋은 추억이 많은 동네여서 이 근처에서 집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서 좋았다. 그동안 집 보러 다닌다고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집에서 사람들이 내민 다정한 손, 따뜻한 눈빛, 기분 좋아지는 말, 같이 웃게 하는 미소에 서서히 파리라는 도시에 적응하게 되었다. 


  오늘도 봉주르! 메르시!




#엄마나랑친구할래 #정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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